밤거리에 나 홀로, 한국 여성이 유독 무서워하는 이유는

한국 관객이 이렇게까지 무서워할 줄 상상도 못했다
타인의 고통을 체험하는 한 번의 경험 
베니스국제영화제 베스트 VR 스토리상 
'동두천' 김진아 감독 인터뷰

‘동두천’

‘동두천’

[매거진M] 집 앞을 어슬렁거리는 강아지 한 마리. 이어 동두천시 외국인 관광특구 거리가 낮에서 밤으로 바뀐다. 미군들이 동두천 밤 거리를 지나간다. 그리고 들리는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 살짝 고개를 돌리면 짧은 원피스에 점퍼를 걸친 여자가 걸어간다. 계속 되는 하이힐 소리를 따라 좁은 골목길에 들어선 순간, 조금 전 그 여자가 나를 통과해 지나간다. 놀라 뒤를 돌아보면 여자가 처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자마자 장소는 초라하고 낡은 여인숙 방으로 바뀐다. 곧이어 병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방바닥 구겨진 이불 속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온다. 또각또각 또 다시 들려오던 하이힐. 거울 속에 누워있는 여자의 시체가 보인다. 하지만 방에는 아무도 없다. 콜라병들이 어지럽게 놓인 누런 장판에 피만 흐를 뿐이다. 
  
제7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베스트 VR 스토리(Best Virtual Reality Story)상을 수상한 ‘동두천’의 내용이다. ‘김진아의 비디오일기’(2002) ‘두 번째 사랑’(2007) ‘파이널 레시피’(2014) 등을 연출한 김진아(44) 감독은 1992년 미군에 의해 살해당한 성 노동자, 일명 윤금이 사건을 모티브로 12분 길이의 VR(가상현실) 다큐멘터리영화를 만들었다.  
  
지난 6월 제19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처음 선보인 ‘동두천’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후, 9월 13~14일 이틀 동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상영했다.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과 재현의 윤리를 다루는 고민들. 김진아 감독과의 인터뷰는 이 질문으로 시작했다. 

M234_영화 ‘동두천’

M234_영화 ‘동두천’

━첫 VR 작품으로 92년 일어난 윤금이 피살 사건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다면.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굉장히 이슈가 된 사건이었다. 당시 정치계, 여성 단체, 반미 운동 단체, 학생운동 단체 등이 모여 범인을 한국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시위 했다. 얼마 후 이들은 윤금이씨 시신 사진을 대중에 공개할지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사진을 공개해 대중의 분노에 불을 붙여야 한다와 피해자 인권을 우선시해야 한다로 나뉜 거다. 결론적으로 윤금이씨 사진은 전국에 노출 됐다. 그때 나는 목적을 위해 수단이 정당화됐다는 것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고, 그 사진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윤금이씨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젠가 꼭 한번 이야기 하고 싶었다. 하지만 폭력의 재현이 피해자에게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망설여지더라. 그러다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VR을 알게 되면서 일사천리로 작업에 들어가게 됐다.” 
  
━공포영화가 아닌데 “무섭다”는 반응이 많다. 소리를 지르고,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나가는 관객도 있더라.  
“한국 관객이 이렇게까지 무서워할 줄 상상도 못했다. 베니스에서의 반응과 정말 다르더라. 가슴이 무겁고 힘들다는 반응은 똑같은데, 외국 관객들은 공포감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공포심을 갖는 건 자연스러운 거다. 사람이 살해당한 장소에 있는데,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순 없으니까. 특히 한국 여성 관객이 더 공포심을 느끼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이런 공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것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하는 거지? 나는 누구지? 라는 궁금증 때문에 더 두려웠다.  
“VR 기계를 쓰는 순간, 관객은 시선은 있지만, 몸은 없다. 네 눈앞의 모든 게 움직이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게 되는 거다. 굉장히 상처받기 쉬운 상태가 되는 거지. 그래서 VR은 사회문제를 다루기에 정말 좋은 매체다. 시리아 난민과 함께 좁은 보트를 타고 표류할 수도, 눈앞에서 북극곰이 녹은 얼음 위를 올라오지 못하는 걸 직접 볼 수도 있다. 말로 백 번 듣는 것보다 타인의 고통을 체험하는 한 번의 경험이 훨씬 더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타인이 되어보고, 타인을 이해하게 만드는 VR의 매력이 정말 잘 드러난 영화였다.  
“범죄가 일어나고, 누군가가 죽고, 그걸 수사하는 영화를 생각해보자. 실재가 아니기에 피해자 인권이나 배려의 문제를 넘어서기가 사실 어렵다. 영화라는 매체가 관음적인 쾌락을 깔고 가지 않나. 또한 우리가 끔찍한 범죄영화를 즐기면서 볼 수 있는 건 영화의 세계는 허구이고, 관객과 스크린 사이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이런 것들이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작년에 VR을 접하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관객들을 이야기에 끌어들이고 싶어졌다. VR은 사회적 메시지를 다루기 좋은 매체다. 관람이 아니라 직접 체험을 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대부분 ‘동두천’을 보면 ‘안됐네. 딱하네’라고 쉽게 말하지 못한다. 이야기가 직접적이고 신랄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아도 내가 의도한 바를 확실히 느끼는 거지.” 
  

━골목길을 배회하는 과정부터 나오는데,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은 어떻게 이뤄진 건가.  
“최초 기획은 피해자가 되어 보는 경험을 하도록 만드는 거였다. 가학적 체험이 아니라 그 방에 여자가 돼 누워있는 거다. 과연 혼자 쓸쓸히 피를 흘리며 죽어갔을 그 여자가 나라면 어떤 느낌이 들까.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 여자가 죽어갈 때 누군가 알아주고, 도와주길 바라지 않았을까.’ 영화에서 여자는 누군가 자신을 봐줄 때까지 골목을 배회하다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관객과 마주친다. 그리고 관객의 몸을 통과해 자신이 죽어가는 방으로 데려간다. 관객은 가해자도 아니고, 피해자도 아니다. 그저 같이 있으면서 여자의 마음을 함께 느끼는 존재인 거다.” 

‘동두천’

‘동두천’

━대사가 많거나 등장하는 장면이 길진 않지만 김보령 배우의 존재감은 확실하다. 캐스팅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영화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주신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김선아 교수님이 추천해 준 배우다. 살해당하는 여자 역할이고, 대사도 없어서 선뜻 하겠다고 나서는 배우가 없었다. 그때 김보령씨가 하고 싶다고 하더라. ‘이 영화에서 연기할 게 있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추운 겨울에 걷는 연기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나를 제발 알아봐줘’라는 눈빛 연기를 부탁했는데, 돌아선 순간 눈물을 딱 흘리더라. 바로 그거야! 소리쳤다. 정말 좋은 배우를 발견했다.” 

━차기작은.  
“‘동두천’처럼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을 VR로 보여주고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시리즈를 계획 중이다. ‘동두천’을 함께한 팀과 뭔가를 더 해보고 싶거든. 또한 여자 주인공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미스터리 스릴러도 준비하고 있다. 아마 내년이 안식년이라 한국에 오래 머무르며 작업을 할 계획이다(김진아 감독은 UCLA 영화·방송·디지털미디어학과 종신 교수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동두천’을 볼 수 있다고.  
“부산국제영화제 ‘VR 시네마 in BIFF’에서 ‘동두천’을 상영한다. 많은 분들이 보시고, 공감해주셨으면 좋겠다.” 
  

"VR영화의 지평을 넓힌 수작"

베니스국제영화제는 세계 3대 영화제 중 올해 처음으로 VR 경쟁부문을 만들었다. 영화를 극장에서 다함께 보는 것이 아니라, VR 기기를 쓴 채 각자 영화를 체험하는 낯선 경험을 영화제에서 하게 만든 것이다.  
  
특히 이제까지 VR에 대한 그 어떤 통일된 상영 포맷과 공간도 없던 상황. 베니스국제영화제는 라자레토 베키오 섬에 있는 창고 건물에 근사한 VR상영관(사진)을 만들었고, 모두 31편을 3개의 섹션으로 나눠 상영했다.  

‘동두천’ 김진아 감독

‘동두천’ 김진아 감독

‘동두천’은 기술과 내용 면에서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VR을 선보인 작품에게 주는 주는 ‘베스트 VR 스토리상’을 받았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존 랜디스 감독은 “‘동두천’은 사회적 이슈를 감각의 영역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VR영화의 지평을 넓힌 수작.”이라고 평했다.  
  
김진아 감독은 “베니스 현지에서 엄청난 과찬을 많이 들었다. ‘동두천’을 본 관객의 반응도 좋았다. 무엇보다 베니스국제영화제가 VR로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게 만드는 가능성을 높게 봐준 거 같아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지영 기자 lee.jiyoung2@joongang.co.kr 사진=김진아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