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금이 피살 사건'을 VR로 만든 김진아 감독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제19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VR <동두천>을 선보인 김진아 감독.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제19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VR <동두천>을 선보인 김진아 감독.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동두천 외국인 관광특구’의 모습을 건조하게 비춘다. 미군 병사들이 샌드위치를 사먹거나, 술집 앞을 오간다. 이어폰을 통해서 어느 여성의 또각또각하는 구둣소리가 자꾸만 들려온다. 관람객은 조금씩 한적한 골목으로 이동한다. 구둣소리를 낸 여성의 모습이 더 자세히 보인다. 노출 심한 원피스 위로 작은 점퍼 하나를 아무렇게나 걸친, 무표정하고 스산한 얼굴이다. 여자는 관람자 쪽으로 곧바로 다가와 마치 유령처럼 지나치더니, 돌아서서 관람자를 45도 각도로 내려다본다. 이제 숨을 골라야 할 때다. 지어진 지 수십년은 된 듯한 초라하고 낡은 여인숙 방, 사람은 없고 촌스러운 꽃무늬 이불만 한 구석에 구겨져있다. 그리고 검붉은 피가 이불 속에서 흘러나와 누런 장판 위로 서서히 퍼져나간다. 거울 속을 보면 아까 그 여자가 누워있다. 하지만 방에는 아무도 없다. 피는 계속 흘러 고인다.

지난주 끝난 제19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동두천>은 가상현실(VR) 작품이다. 관람객들은 차례로 극장에 들어가 VR 전용 기어를 쓰고 이 기괴하고 음산한 영상을 목격해야했다. 여기엔 새로운 영상 테크놀로지가 동반하곤 하는 어떠한 시각적 쾌감도 없다. 어느 기지촌 여성의 끔찍한 삶, 그를 통해 드러나는 여성 육체에 대한 학대, 한미 관계의 모순이 나타날 뿐이다.

김진아 감독(44)이 <동두천>의 모티브가 된 ‘윤금이 피살 사건’을 접한 것은 대학 1학년 때였다. 민족주의자, 반미운동가, 여성운동가, 학생운동가 등이 미군에 의해 처참하게 희생된 기지촌 여성의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모였다. 이들의 목표는 유사했으나, 방법이 달랐다. 특히 윤금이씨의 시신 사진을 대중에 공개할지를 두고 첨예하게 입장이 갈렸다. 사진을 공개해 대중의 분노에 불을 붙여 운동의 범위를 확대하자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고, 피해자의 인권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다.

김진아는 후자였다. 그리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재현의 윤리’에 대해 생각했다. 다큐멘터리 <그 집 앞>, 하정우와 베라 파미가가 주연한 극영화 <두번째 사랑> 등 다수의 장편을 내놓으면서도 ‘윤금이 피살 사건’은 김진아의 못다한 프로젝트였다. 김진아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동두천> 연출의 계기는?

“극영화 버전을 염두에 두었고 투자 성사 직전 단계까지도 갔다. 하지만 너무나 복잡하고 어렵고 정치적으로 민감했다. 게다가 폭행당한 여성의 신체를 어떻게 재현할지도 여전히 문제였다. 그러다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VR 포럼 사회를 맡은 걸 계기로 성냥불에 불이 켜진듯한 느낌이 들었다. 각자의 손에 쥐어진 비디오 카메라가 새로운 정치적 순간을 만들었듯, VR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VR이 적합했나.

“내 작품의 화두는 언제나 여성의 몸이었다. 영화는 원래 관음적 매체고, 재현 자체가 폭력이다. 전쟁 같이 끔찍한 일도 팝콘 먹으면서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영화다. 현대 예술에서 재현은 늘 문제였다.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표현했다고는 하지만, 작가의 미적인 욕심도 읽힌다. 반면 VR는 보지 않고 체험하게 한다. VR을 보면서 즐길 수는 없다. VR이라면 기지촌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을 재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자가 폭행·살해 당하는 장면 대신 사건과 무관한 듯한 동두천 풍경이 한참 나온다.

“공간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한국 국토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미군 기지, 주변의 기지촌을 보여주려 했다. 관객이 그 속에서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읽어냈으면 했다.”

-VR과 영화의 연출상 차이는 무엇인가.

“영화의 기본 단위는 프레임이지만, VR에는 프레임이 없다. 영화는 연출자가 담고 싶은 세계만 보여준다. 그래서 어떤 프레임도 중립적이지 않다. 무언가를 선택하는 순간, 다른 무언가가 배제된다. 영화 창작자에게 막강한 권력이 있다. 하지만 VR은 그렇지 않다. 장소를 정해 카메라를 가져다 놓으면 ‘끝’이다. 360도가 찍히니까, ‘액션’ 하면 감독과 촬영감독 모두 미리 눈여겨두었던 골목이나 전봇대 뒤로 바퀴벌레처럼 흩어져 몸을 숨기기 바쁘다(웃음). 다만 장소를 잘 골라 그곳에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어야 하고, 관객의 시선을 유도하는 센스가 있어야 한다.”

-VR처럼 기술이 미학을 추동하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긍정적이지만 내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VR을 접하고는 달라졌다. 영화에도 여러가지 과도기적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VR에는 그 모든 걸 넘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마치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이 처음 등장했을 때와 같은 충격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기술은 산업, 엔터테인먼트에 먼저 적용되곤 한다. VR을 이용한 성산업 같은 것이 분명 번창할 것 같다.

“신기술은 돈이 든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팔리는 것은 성과 폭력이다. VR도 체험을 중시하니까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VR은 인터넷과 같지 않을까. 양날의 칼이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위험천만하지만 잘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VR로 얼마든지 인류애적인 접근을 할 수 있다. 얼음 위에서 미끄러지는 북금곰이 돼 본다면, 주변의 숲이 벌목되는 아마존 나무가 돼 본다면 어떨까. <동두천> 제작 소식을 듣고 재직중인 학교(UCLA)의 다양성 평등 포용 위원회에서 연락이 왔다. VR의 활용 가능성을 본 것이다. VR은 한 마디로 타자와 완전히 공감하는 경험을 유도하는 매체다.”

-전통적인 스토리텔링, 미쟝센의 영화는 사라질까.

“당분간 사라지진 않겠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스토리텔링이 먹히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이야기 구조도 점점 게임의 구조를 닮아간다. 기승전결 없이 첫째 판, 둘째 판, 세째 판을 이겨 나가는 식이다. <반지의 제왕>이나 <헝거 게임>이 그렇다. 요즘 젊은 관객은 <벤허>처럼 클래식한 스토리텔링의 영화는 지루해서 못본다. 언젠가 영화는 지금의 클래식 음악처럼 될 것 같다. 찾는 사람이 있어서 사라지진 않지만, 새롭게 만드는 사람은 적은 그런 장르.”

 

Source: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