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아 감독은 여성의 욕망에 천착한다. <김진아의 비디오 다이어리>와 <그 집 앞>에서 그녀의 화두는 침묵하는 여성의 욕망을 수면 위로 떠올려 형상화하는 일이었다. <두번째 사랑> 역시 그런 맥락에 있지만, 자기고백 색채가 짙었던 전작들에 비해, 정통멜로의 관습을 비교적 충실히 따라가며 차분히 극적 긴장을 쌓아올리는 작품이다.가정이 불안정한 백인 중산층 유부녀(베라 파미가)와 생존이 불안정한 동양인 하층민 남자(하정우)의 사랑은 말하자면, 애초 사랑을 가로막는 모든 장벽들로 촘촘히 둘러싸인, 이미 비극적 결말을 내재한 것이다. 계급과 인종은 이 비극적 멜로의 씨앗이기는 하지만, 영화는 인물들의 힘으로 거둬낼 수 없는 그 장벽에서 이야기를 끌어내지는 않는다.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한 사랑에 빠져드는 두 남녀의 심리적 변화와 겉잡을 수 없는 욕망 그 자체다. 그러나 영화는 인물들의 내면에 함께 동요하지 않고 시종일관 고요한 시선을 유지한다. 인물의 감정이 과잉된 숏에서조차 영화는 냉정하게 커트하고 구구절절한 설명 대신 생략과 절제를 택한다. 홀로 남겨진 인물을 담아낼 때도 카메라는 창(문)밖에서 안을, 안에서 밖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냉정한 현실적 조건들이 충돌하는 질퍽하고 고통스러운 로맨스지만, 영화는 여자의 능동적인 욕망에 무게를 두며 너저분한 현실의 곁가지들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정리하는 길을 택한다. 영화의 마지막, 마치 저 멀리 ‘영원’을 보듯, 카메라를 응시하며 미세하게 미소 짓는 여자의 얼굴은 격정적 욕망의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 새겨진 여인의 초상이다.
—남다은 (2007년 6월 20일)

골방에서 길 위로, 욕망이 나를 데려다 주리라
“컷!” “롤 더 사운드!” “스피드 업!” “슛 들어갑니다!” 영화 <그집앞>의 촬영 마지막 날, 서울 대학로의 작은 술집 ‘바스키아’에는 김진아 감독과 베니토 스트란지오 촬영감독, 한국인 스탭이 내지르는 영어와 우리말의 촬영사인이 뒤섞여 짱짱 울려퍼졌다. 그중에서도 작은 몸집의 깡마른 김진아 감독의 목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그녀는 미국 칼아츠영화학교 재학 중 거식증을 앓는 스스로를 찍은 비디오다이어리, <김진아의 비디오일기>가 전주국제영화제에 상영되면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다. <그집앞>은 김 감독의 첫 극영화이다. 이 작업은 그녀의 성마른 목소리 만큼이나 그녀 스스로의 변화를 동반하는 일인 듯했다. 김진아 감독은 전작인 퍼포먼스 다큐멘터리들, <빈 집>이나 <다채로워지는 아침> <김진아의 비디오일기>에서 유난히도 ‘조용한’ 사람이었다. 거식과 폭식을 반복하며 자폐적으로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스스로의 모습과, 거기서 벗어나려고 시도한 제의 같은 퍼포먼스들을 기록한 전작들은, “다른 누구에게 보여줄 생각이라곤 하나도 없이” 그저 혼자서 스스로를 찍은 작품이었다. 그 영화들에선 긴 시간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작업의 결과로 거식증을 극복하고 수년 뒤 시작한 이 극영화 작업은 그녀의 다큐와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그녀에게 전과는 다른 태도와 역할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집앞>은 가인과 도희, 두 여자와 희수라는 남자 셋이 등장하는 내밀한 심리 드라마이다. ‘집에 머무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가인(최윤선)은 <김진아의 비디오일기>의 주인공인 감독 자신의 모습이 많이 투영된 인물. 거식증을 앓으며 집안에 칩거하는 미국 유학생이다. <그집앞>에서 가인은 거식증에 걸려 괴로워하는 자신을 감당치 못해 남자친구 희수(정찬)마저 한국으로 떠나버리자, 허전함에 못이겨 준이라는 이름의 유부남과 섹스를 한다. 그리곤 더욱 심한 거식증에 빠져든다.
가인과 동전의 앞뒷면이라 할 만한 다른 인물 도희(이선진)는 성적 불감증에 걸린 인물로 준의 아내다. 도희는 남편과 별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다가 홀로 유럽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와 섹스를 하고,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자 낙태를 결심하고 한국으로 온다. 임신 뒤 도희는 예전과는 정반대로 자신의 몸 안에서 성욕이 마구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고, ‘길 위를 떠도는 여자’라는 이름뜻 그대로 가인과는 반대로 집안에 머물지 못하고 길 위를 배회한다. 그러던 중 한국으로 돌아온 가인의 남자친구 희수를 만나게 된다. 뜻밖에도 희수는, 도희에게서 가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가인이 김진아 감독 자신의 모습인 데 반해 도희는 감독이 “내 자신 안에 숨어 있던 그 누구”를 발견해 만들어낸 인물이다. 오랫동안 일상적으로 찍어온 비디오일기들을 편집해 <김진아의 비디오일기>라는 작품으로 다듬는 동안 그녀는 습관적으로 순간순간 떠오르는 단상들을 메모했는데, 그걸 모아놓고 보니 ‘도희’라는 또 다른 인물이 떠올랐다고. 도희의 등장으로, <그집앞>은 식욕과 더불어 성욕을 중요한 모티브로 삼게 되었다.

영화의 줄거리를 정리해놓고 보면 <그집앞>은 꽤 밀도있는 사건 중심의 드라마로 보인다. 유학생 커플의 이별이 있고, 유부남인 다른 남자와의 섹스가 있고, 유럽여행이 있고, 한국으로 날아가는 비행기가 있고…. 그러나 <그집앞>의 시나리오는 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배반한다. 아니 시놉시스는 <그집앞> 시나리오에 대한 ‘지난 줄거리’에 가깝다. 영화는 이미 대부분의 사건이 종료된 뒤 출발하기 때문이다. 가인을 비추는 카메라는, 이미 남자친구인 희수가 떠나버리고 유부남과의 우연한 섹스도 지난 뒤 집안에서 예전에 희수와 찍었던 비디오를 보며 소일하는 그녀의 모습만을 담는다. 준과의 섹스, 희수와의 이별 등은 전화의 자동응답장치나 가인의 혼잣말 같은 내레이션으로 알려진다. “저… 준의 아내 되는 사람이에요. 오래 전부터 한번 통화하고 싶었는데…. 따지려는 게 아니고… 그냥 한번 얘기했으면 해요. 다시 전화할게요.” 준의 아내인 도희의 목소리가 전화의 자동응답장치에서 들리고, “그의 집에서 관계를 맺은 건 처음이었어. 그리고 이제 그와는 마지막이야. 처음부터…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는 불감증인 아내를 대신할 여자가 필요했던 것뿐이고… 나는 그저 네가 떠난 뒤 내 몸을 덥혀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뿐이야. 희수야… 나는… 아직도… 네가 밉다. 나, 다 다시 시작하고 싶어. 2년 전 희수 너와 헤어진 다음날로 돌아가 모두 다 다시 시작하고 싶어.” 가인은 혼잣말처럼 희수와의 관계 그리고 이별을 관객에게 고지한다. 가인이 집안에서 보는 비디오는, 캘리포니아의 사막으로 희수와 여행을 갔을 때 희수가 자신을 찍었던 테이프. 실제로 김진아 감독이 직접 찍은 이 테이프는 영화상에서는 희수가 찍은 것으로 설정돼 있어 자연히 테이프 안에서도 보이는 건 가인뿐이다. 결국 가인의 촬영분에는 가인 이외의 그 누구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도희도 가인보다는 동선이 많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도희가 영화에 등장하는 시점은 이미 유럽여행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와 임신을 확인하는 때이다. 그 장면은 잠깐이고 얼마 안 있어 트렁크를 들고 집을 나간 뒤, 바로 다음 서울 거리를 트렁크를 끌며 배회하는 그녀의 모습이 이어진다. 사건의 디테일은 과감히 생략돼 있고, 갑작스런 한국행을 택한 도희의 심기 역시 그녀가 미국 집의 전화기에 남긴 메시지의 형태로 암시될 뿐이다. “여보… 나야. 거기는 지금 밤늦은 시간일 텐데…. 집에 없네. 나 지금 아주 멀리, 아주 멀리 와 있어. 쪽지만 하나 남기고 사라져버려서… 미안해. 그런데… 지금은… 아직은 당신하고 이야기할 수가 없어. 조금만 생각이 더 정리되면 그때 이야기할게….” 픽션으로 새로 가공되고 여러 인물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처럼 <그집앞>의 톤은 <김진아의 비디오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보인다. 여전히, 김진아 감독은 “여성의 몸과 욕망”을 “여성 자신의 심리를 그림으로써” 드러내고자 한다. “사건 중심으로 가는 것보다, 내면심리를 그려내는 게 더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메시지라기보다는, 그저 여성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에요.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폭로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뽀삐>나 <우렁각시>처럼 초저예산으로 독립 장편극영화들이 하나둘씩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집앞>은 그 가운데서도 독특한 케이스임에 틀림없다. 이 영화는 극의 내용상 미국과 한국에서 나뉘어 촬영됐고, 미국에서는 피터 그레이, 한국에서는 베니토 스트란지오라는 다른 촬영감독이 각기 다른 디지털카메라로 찍었다. 인물도 미국 촬영분에는 가인만 나오고, 한국촬영분에는 가인 없이 도희와 희수가 번갈아 등장한다. 가인역의 최윤선, 도희역의 이선진 모두 오디션으로 뽑았다. 정찬은 김 감독이 <로드무비>를 보고서 캐스팅했다. 제작비는 후반작업 비용과 홍보비 등을 제외한 순수제작비가 1억원가량 들었는데, 그중 3천만원은 영진위에서 지원받았고 나머지 7천만원가량은 김진아 감독과 그녀의 남편이기도 한 LA 어바인대학 교수 김경현씨가 설립한 독립영화사 ‘픽처 북 무비스’가 사업체 융자를 받아 충당했다. 장편극영화를 완성하기에는 빠듯한 액수인 이 예산이 지켜질 수 있었던 데에는 배우와 스탭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큰힘이 되었다. 정찬이 노개런티를 자원한 것을 비롯해, 배우들뿐만 아니라 두명의 촬영감독들도 그리 많지 않은 수당으로 이 영화에 참여했다고 감독은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친구>와 촬영감독을 맡으며 한국영화와 이미 인연을 맺어온 피터 그레이나 피터 그리너웨이의 <필로우 북> 등에서 카메라 오퍼레이터를 했던 베니토 스트란지오 등 두명의 촬영감독은 ‘저예산영화’ <그집앞>이 자랑하는 ‘화려한’ 스탭진이다. 김진아 감독이 부산영화제 등을 통해 친분을 쌓아 자연스럽게 함께 일하게 된 이 두명의 촬영감독은 <그집앞>의 질적 완성도를 어느 정도 보장해주고 있는 듯 보인다.

두 여자, 두 나라, 두 촬영감독
두 촬영감독이 나누어 찍은 <그집앞>은 ‘가인’을 그리는 미국 촬영분과 ’도희’를 따라가는 한국 촬영분에서 촬영스타일의 대비를 보인다. ‘가인’을 찍은 피터 그레이는, ‘DSR 500’ 기종 카메라를 사용하고 거의 대부분 삼각대를 써서 집안에 칩거하는 가인을 밀폐된 느낌이 나게 무겁게 담아냈다. 반면 ‘도희’를 찍은 베니토 스트란지오는, 좀더 가벼운 ‘PD 150’ 기종카메라를 가지고 대부분 핸드헬드 기법으로 길 위를 떠다니는 도희의 행보를 자유로이 좇았다. ‘가인’의 촬영분은 블루톤이 주조를 이루고, ‘도희’의 촬영분은 빛바랜 컬러사진 같은 색감을 의도했다고. 시나리오는 ‘가인’과 ‘도희’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김진아 감독은 이 두 부분을 시나리오대로 나누어 붙이거나 아예 뒤섞어 교차편집을 하거나 두 방법 중 하나를 조만간 택할 예정이다. 교차편집을 할 경우 영화는 각기 다른 촬영스타일이 반복적으로 교차되면서 시각적인 느낌을 더욱 풍성하게 할 것으로 보인다.

<그집앞>은 감독이 자신을 대상으로 찍었던 다큐를 확장하고 거기에 픽션을 섞은 극영화이다. 이 독특한 작업에서 김 감독은 전에 자신이 도맡았던 ‘촬영자’와 ‘배우’의 두가지 역할을 다른 이들에게 넘겼다. 자신이 직접 촬영자이자 피사체가 되는 대신 자신의 의사를 촬영자와 배우에게 전달하고 그들을 통해 표현해 내려고 했다. “촬영의 경우 한컷한컷 정사진으로 미리 구도를 찍어 촬영감독에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여전히 촬영감독이 가진 스타일이 녹아날 것이다. 배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 똑같이 할 수 없고 배우의 습성적인 면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부분들이 긍정적인 결과로 나와 만족한다.”
김진아 감독에게 <그집앞>의 작업은, 스스로가 ‘가인’에서 ‘도희’로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골방에서 오로지 혼자서 아무에게도 보여줄 생각 않고 비디오다이어리를 찍었던 그녀가 세상으로 나와 배우와 촬영감독, 그리고 가공된 스토리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이 작업의 결과가 어떻게 완성돼 나올지 기대된다. 한국쪽 공동제작사인 청년필름은 후반작업 비용을 마련해 작업을 마치는 대로 개봉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수임 (2003년 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