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MDb] - 13 Lives (서틴 라이브스) - 론 하워드, 2022
Published January 3rd, 2023 - Source
by 김진아 (UCLA 영화과 교수, 감독)
그곳에는 어른들이 있었다.
*** 이 글에는 영화의 플롯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미 결말이 알려진 실화에 기반한 이 영화에 이렇다 할 반전은 없다. 오히려 폐쇄공포증이 있거나 2014년과 2022년의 참사의 트라우마로 아파하는 이들은 이 글을 읽고 나서 영화를 볼지 말지 결정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올해 여름, 13 LIVES를 나는 미국에서 보았다. 나는 이 영화를 비웃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백인 남자 감독이 만든 제3세계의 실화 사건, 심지어 영국 어른들이 태국의 소년들을 구하는 이야기란 말이지… 백인 남성의 자뻑이 가지가지 형태로 부활하고 인종혐오 범죄가 만연하며 낙태가 불법화 되어 세상이 거꾸로 가는 것 같은 미국의 현 시점에서 백인 구원자 서사를 사용한 재난영화라니. 심지어 감독은 론 하워드, 스콜세지도 제임스 그레이도 아닌 론 하워드란 말이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고 10분도 되지 않아 나는 알았다. 나는 이 영화를 비웃을 수 없음을. 쏟아지는 폭우 속에 갇힌 아이들과, 칠흑같이 어두운 물 속을 헤엄치는 동굴 다이버들을 보는 순간 메이는 목에 몇 번이고 자리를 떴다가 화면 앞으로 돌아와야 함을. 나의 삐딱한 시선은 자연 앞에 작아지고 재난 앞에 무력한 모습으로,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하는 어른들의 초라하고 정직한 모습에 바뀌었음을. 2014년과 2022년을 기억하는 대한민국의 성인이, 이 영화를 객관적으로 보기는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함을.
2018년 태국의 탐루앙 동굴에서 때이른 장마로 13명의 축구팀 소년들과 코치가 동굴에 고립되었던 것은 뉴스의 ‘세계’ 면을 상습적으로 건너뛰는 사람들에게도 어렴풋이 기억날 큰 사건이었다. 축구 연습을 마치고 코치와 함께 동굴로 놀러간 아이들은 갑작스런 폭우에 침수된 동굴 안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고립되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 태국 정부, 전 세계에서 날아든 자원활동가와 다이버들의 협력으로 코치와 아이들, 이 열세명의 생명은 한 명도 빠짐없이 동굴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러나 어떻게? 아이들이 고립된 지점은 입구에서3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고 구조대원들이 투입되기 시작하였을 때 동굴 내부의 터널은 이미 침수되어 급류가 흐르고 있었다. 심지어 이 미로 같은 터널은 성인의 몸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좁은 데다가 날카로운 종유석이 다이버의 신체와 장비를 위협한다. 때로는 몸을 돌릴 수도 없이 앞으로만 전진할 수 있는 이 좁디 좁은 터널에는 빛도 공기도 없다. 마치 하루키의 소설 속에나 등장할 것 같은 이 터널을 헤엄쳐 아이들을 찾기 위해서는 동굴 다이빙이라는 극도로 특화된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영국에서 자원하여 날아온 동굴 다이버, 존 볼라텐 John Volanthen (콜린 파렐 분) 과 릭 스탠튼 Rick Stanton (비고 모텐슨 분)은 죽었을 거라고 예상했던 아이들을 극적으로 찾아내지만 그들의 얼굴은 아이들을 발견하고 나서 오히려 더 어두워진다. 아이들이 모여 있는 지점은 동굴 입구의 물을 뽑아내고 가까스로 설치된 구조 캠프에서도 6시간을 쉬지 않고 헤엄쳐야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산소탱크가 지탱하기 힘든 이 거리를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터널을 통해 이동하는 것은 전문 다이버에게도 생명을 내걸어야 하는 극한의 위업이다. (구조 작전을 수행하던 태국 다이버 한명은 목숨을 잃었으며 또 다른 구조대원은 상처의 감염으로 사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을 살려서 밖으로 데리고 나온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목표는, 아이들을 살려서 + 데리고 나온다는 상호충돌적인 두가지 목표로 분리되어 버린다.
영화가 미국에서 출시되었을 때 소수의 평론가들은 실망을 표했다. 헐리우드식 재난 스펙타클을 기대한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드라마와 서스펜스가 부족하며 밋밋한 졸작이라고 평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콜린 파렐과 비고 모텐슨이 연기한 두 리드 다이버 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캐릭터가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도 따랐다. 그러나 이 비판들은 아주 정확하게 영화의 미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영화는 주인공 "구원자" 캐릭터에 공감하며 울고 웃는 영화가 아니라, 구조라는 불가능한 미션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그 과정을 수행해 내는 다수의 수행자들을 묵묵히 지켜보아야 하는 영화이기에. 그래서일까, 백인남성의 영웅주의와 구원자 서사에 날 선 비판을 가하는 유색인 여성 (women of color) 비평가들과 외국인 평론가들이 영화에 더 후한 점수를 주었다. 영화의 미덕은 영웅주의의 증발이기 때문이다. 물론 스펙터클과 해피엔딩의 통쾌한 카타르시스도 그와 함께 증발했다. 영화를 보고 난 관객의 마음에는 기껏해야 안도감과 함께 무거운 질문들이 남는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었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매우, 고통스럽다.
“The old men found the boys!”
두 영국인 동굴 다이버들이 태국의 해양경찰과 다이버들이 들어가지 못한 junction 9을 지나 소년들을 찾아내어 동굴 밖으로 나오자 관계자들이 소리친다. (숨 쉬기가 어려워 세번이나 쉬면서 영화를 보는 동안 유일하게 빵 터진 장면이다.) “Old men”을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직역은 물론 “노인들”이 되겠으나 원어 태국어의 뉘앙스를 살린 한국어는 무엇일까? 늙은이들? 어르신들? 아재들? 아무튼 중년을 지나 초로라고 표현해도 무색할 이 두 백인 남성들은 그냥 이렇게 후줄근하게 축소되어 불린다. 작전 회의를 할 때면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은 커녕 노안 안경을 코끝에 걸쳐 써야 하는 두 중년 남자들은 아이들에게 그닥 애틋한 눈길을 보내지도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순간으로 보여지면 동굴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아피찻퐁 위라세타꾼 감독과의 오랜 협력자이자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으로 셀룰로이드 필름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영화적 노스탤지아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태국 촬영감독 사욤부 묵디프롬 (Sayombhu Mukdeeprom) 역시 그들을 영웅으로 비추지 않는다. 카메라의 묵묵하고 겸허한 시선은 이 두 ‘노인’을 연기한 쟁쟁한 배우들에게 그럴싸한 클로즈업 한 컷을 선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어른이다. 소강상태에 머물던 폭우가 다시 시작되어 동굴에 차오르는 급류를 보고도 담담히 “서두르자”- 한마디 하고 물 속으로 다시 뛰어들 수 있는. 그리고 그 현장에는 이 다이버들 외에도 너무나 많은 어른들이 있었다. 영화에는 다 나오지 않지만 실제 현장에는 백 여개의 정부기관에서 투입된 수 많은 공무원들, 9백명의 경찰, 2천명의 군인은 물론 구조팀에게 매일 2만끼니의 따뜻한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 모인 7천명의 자원 활동가가 있었다. 물론 이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할 수 있도록 지휘를 한 책임자들이 있었다. 첫날부터 밤을 새며 현장을 직접 지휘하는 시장은, 다이버 한명이 죽자 동굴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고,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다시 그 선언을 번복한다. 민간인 수자원 엔지니어는 빗물이 지하수로 변해 동굴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물길을 바꾸는 중책을 자진하여 지휘한다. 마을에도 어른들이 있다. 농부들은 자신들의 논을 침수시키며 물길을 열어 동굴 안에 물이 불어나지 않게 시간을 벌고, 물길을 내기 위한 파이프가 부족하자 대나무를 베어 수관을 만든다.
그러나 아이들을 살려서 + 동굴을 데리고 나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어른들은 전혀 다른 무게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릭과 존, 두 베테랑 다이버들은 아이들을 산채로 데리고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생각해 내고, 동굴 다이버이자 해리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마취과 의사, 리차드 해리스Richard Harris (죠엘 에저튼 분) 를 호출한다. 해리의 의견도 두 사람과 같다. 6시간의 동굴 다이빙 동안 아이들은 반드시 익사할 것이다. 아이들을 살려서 동굴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해리는 두 다이버가 입 밖에 내기조차 힘든 방법을 자신에게 제안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소스라친다. 6시간의 다이빙을 견뎌낼 수 있도록 아이들을 마취시키고 팔다리를 묶어 한 명씩 데리고 나오는 방법이다.
6시간의 다이빙 동안 아이들이 중간에 깨어나 익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반복하여 마취제를 주사해 가며, 공기도 빛도 없는 수중 터널을 통과하는 구출 작전. 동의를 얻지 않는 마취는 엄연히 불법이며 아무도 시도한 적 없는 이 방법이 성공할 확률은 미지수이다. 하지만 때 이른 장마비는 시시각각 불어나는 중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이대로 고립되어 반드시 죽는다. 어른들은 촌각을 다투는 이 상황에서, 어쩌면 비윤리적이며,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 이 작전을 집행하기로 결정한다. 극비리에 진행하기 위해 언론 보도를 중지하고 심지어 아이들의 부모들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작전 중 아이들이 죽을 확률이 살 확률보다 크다는 것을 인지한 당국은 다이버들에게 사면을 보장하고, 다이버들은 자신들의 목숨 또한 위태로울 것을 알면서 불어난 물 속으로 뛰어든다. 그렇게 그곳에는 자신과 타인의 삶을 송두리채 바꿀 수 있는 무거운 결정을 내리고 책임지는 어른들이 있었다.
이 결정이 옳은 것인지 아닌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한 명도 빠짐없이 구조해 낸 해피엔딩으로 이 결단은 “옳은 결정”이 되었지만 만일 그렇지 않았어도 세상이 그들에게 같은 평가를 내려 줄까. 아마 그렇지 못할 것이다. 아니, 분명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 그들이 내릴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었음이 분명하되, 이 선택이 윤리적으로 완벽한 결정이었을까. 법과 도덕과 의학의 어느 지점을 교차하는 이 무거운 질문에 나는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겠다.
그러나 나는 안다.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뒤늦게 구조팀에 합류한 다이버 크리스 쥬월 Chris Jewell (톰 베이트먼 분) 이 동굴의 에어 포켓 안에 길을 잃고 바보처럼 떠 있는 모습이다. 실제 다이버들이 커피 속을 헤엄치는 것 같았다고 증언한, 시각이 아니라 물 속에 매어 놓은 줄의 촉각에 의해 통로를 헤엄쳐 나가던 크리스는 동굴에서 줄을 잃고 길을 잃는다. 어두운 물 안에서 패닉하고, 급기야 자신의 심리 상태를 판단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기로 한다. 에어포켓 안에서 아이를 물위로 떠올려 보듬어 안은 채로 동료가 나타날 때까지, 아니 나타나길 바라며 침착하게 기다린다. 침착하게? 아니, 화면 속에는 보이지 않는 그의 떨림이 관객인 내게도 느껴진다. 내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과 그 이상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족함이 타인의 생명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두려운, 나약하고 정직한 인간의 모습.
어른은 무엇인가.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으로 인한 결과를 책임지는 것. 그게 어른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기성세대가 이미 망쳐버린 세상을 표류해야 하는 어린 생명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이 시대에 어른의 의미는 확장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책임의 무게가 자신을 평생 짓누르는 트라우마가 될지라도,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는 것. 완벽을 기대할 수 없겠지만, 피하지 않고, 오직 최선을 다해 애를 쓰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