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 - 보더리스 스토리텔러

Published April 28th, 2022 - Source

인터뷰어, 서문 문성경

김진아는 서울과 할리우드를 오가며 활동하는 영화감독이다. 시각예술을 시작으로 실험영화, 다큐멘터리, 극영화,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까지 신작마다 새로운 장르에 성공적으로 도전해 온 개척자다.

한국에서는 미술을, 미국에서는 영화를 공부했다. 학교에 서 실험 비디오 작업을 수 편 제작했고, 첫 장편 다큐멘터리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2002)가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장편극영화 데뷔작 〈그 집 앞〉(2003) 은 로카르노영화제 ‘현재의 작가’ 경쟁부문에 초청되었고, 미국 영화잡지 『필름 코멘트(Film Comment)』가 선정한 ‘2003년 최 고의 영화 10편’에 포함되었다. 〈두 번째 사랑〉(2007)은 최초의 한미합작 영화이자 한국영화 최초 선댄스영화제 자국 경쟁부문 진출작으로 기록된다. 장편 다큐멘터리 〈서울의 얼굴〉(2009)이제57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고, 같은 해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한국 여성 감독으로는 처음으로 세계 삼대 영화제 경 쟁 부문의 심사위원을 맡는 영광을 누렸다.

그의 앞장선 행보는 작품 활동에만 그치지 않는다. 아시아 여성 최초로 하버드대 시각예술학과에서 교편을 잡았고, 한국 영화이론을 정규 수업으로 강의한 첫 인물이기도 하다. 현재는 UCLA 대학교 영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8년 미국 언론 『버라이어티(Variety)』가 전 세계 영화학교를 대상으로 설문한 최우수 교육자에 이름을 올렸다.

작가는 지난 5년간 두 편의 VR 작업을 공개했고 전시와 수상 경력을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동두천〉(2017)은 1992년 경기도 동두천에서 벌어진 한 기지촌 여성의 죽음과 그 이미지의 역사를 다시 쓴 작품이다. 〈소요산〉(2021)은 1960년대 한국 정부가 미군 기지촌 여성들의 성병 검사와 치료를 명목으로 이들을 김진아금했던 소요산 입구의 낙검자 수용소, 일명 몽키하우스를 경험 하게 한다. 〈동두천〉은 VR 기술과 서사의 만남이 미미하던 시기에 베니스국제영화제 버추얼 리얼리티 경쟁부문 베스트 VR 스토리상을 수상했다. 감독은 신기술을 환영하는 마음에도 불구 하고 예술로의 확장성에 반신반의하던 이들에게 매체의 핵심이 기술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만났을 때 발견될 수 있는 영화적 가 능성을 입증했다.

어디에도 없던 사례를 만들어가고 있는 김진아의 존재는 경계 를 넘어 확장될 한국영화계의 자부심이다.

부재의 시: 프레임을 너머 가능성의 예술로

미디어 아트부터 다큐멘터리, 극영화까지 다양한 형식의 무빙 이미지 작업을 해오셨습니다. VR[1]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시작할 때 두려움은 없으셨는지요?

새로운 매체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내 무지를 도와줄 수 있는 전문가분들을 믿고 나는 그분들에게 내 비전을 확실하게 소통할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태도는 여러 가지 매체를 접해본 경험 덕분이기도 하지만 규모 있는 상업영화를 만들며 배운 것이기도 하다. 상업극영화를 만들 때 감독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미미하다. 영화의 예산이 커질수록 더 많은 전문가들이 모여들게 되고, 그럴수록 감독의 무지와 무능이 더 드러나게 되니 영화라는 매체가 산업과 예술을 연결시키는 방식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무튼, 당시로서는 최초였던 한미 합작 영화를 만들기도 하고(<두 번째 사랑>(2007)), 태국과 중국처럼 언어가 안 통하는 나라에 가서 적지 않은 예산이 투입된 상업영화의 제작과 연출을 겸하기도 하면서(<파이널 레시피>(2014)) 내 힘으로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나 새로운 기술에 대한 망설임이 많이 사라졌던 것 같다.

VR 작업을 하며 기존 매체와 가장 다르다고 생각하는 지점이 무엇인가요? 

VR과 기존의 2D영화와의 교집합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모든 VR이나 실감미디어(Immersive Media)를 영화의 한 장르로 축소해서 보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본다. 시간성을 배제하고 게임 엔진으로 만들어진 비서사 구조의 VR 작품들이 주류가 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서사 구조를 가진  시네마틱 VR(Cinematic VR)의 경우라 할지라도 2D영화와 VR을 기호학적으로 비교해 보면 두 매체의 다른 점이 극명히 드러난다. 영화 언어는 한 시공간(사건)을 여러 앵글과 숏 사이즈로 촬영한 후 편집하여 재구성하는 매우 독자적인 문법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상현실 영화에서 그런 방식의 편집은 불가능하다. 더 근본적인 차이는 프레임의 부재이다. 일반 2D영화를 보여주는 직사각형의 프레임, 렌즈 안에 포착되는 세계를 연출자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권력이다. 한 프레임이 결정되는 순간, 그 프레임 밖의 세상은 모두 버려지는 것이다. 반면에 VR영화에는 프레임이 없다. 현실 세계와 다름없이 확 트인 공간 안에서 어디를 볼지 결정하는 것은 관객이다. 물론 시네마틱 VR을 만들 때에도 감독이 원하는 곳으로 관객의 시선을 유도하기 위해 동선이나 사운드 등 여러 가지 장치를 쓴다. 그러나 평면 영화처럼 프레임이라는 강력한 시각적 통제를 사용해서 아름다운 꽃 위에 사뿐히 앉은 나비만 프레임 안에 선택하여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이다. VR영화의 뻥 뚫린 360도 공간에서는 그 꽃이 버려져 있는 쓰레기 더미와 그 뒤로 보이는 연기가 오르는 능선, 시커먼 하늘까지 관객이 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기호학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VR이라는 매체는 이미지 전달이 훨씬 더 민주적인 매체이다. 

VR로 작업한 첫 번째 작품이 <동두천>입니다. VR이라는 매체로 ‘윤금이 피살 사건’을 다뤄 봐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었나요?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윤금이 피살 사건’이 일어났다[2]. 처음 대자보에 붙은 사건을 읽고 느낀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미군 위안부들이 각종 미군 범죄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모두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한 사건이 이렇게까지 주류 사회의 표면에 떠오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리 모두 분개했고 시위에 참석했지만, 정작 나를 가장 분노케 한 것은 전단지와 대자보, 신문 기사에 도배되어 있는 윤금이 씨의 사체 사진이었다. 참혹하게 살해된 한 젊은 여성의 이미지가 공개되었고, 그녀의 인권이 무참히 짓밟혔다. 여성의 이미지가 무한 복제 되어 여성 자신이 아닌 다른 대의를 위해 사용되는 것에 본능적으로 강렬한 분노를 느꼈다. 그 분노를 표현할 방도가 당시로서는 없었다. 이미지에 속한 인권, 재현의 윤리에 대한 아무 논의 없이 시위가 지속되는 동안 내가 느낀 분노와 무력감은 결국 피해자에 대한 모종의 부채감으로 내면화되었던 것 같다.

사실 이 사건이 내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윤금이 사건’과 관련 이미지들은 내게 큰 질문을 던졌다. 조악한 흑백 사진, 그 아래 적힌 도발적인 슬로건과 엉터리 영어 문구들이 인쇄된 전단지를 볼 때마다 후기 식민 사회에서 살고 있는 여성이라는 내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마음속에 낙인처럼 찍혔다. 이후 이 이야기를 영상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잊은 적이 없다. 시나리오 작업도 진행했었고 국내외 제작사와 꽤 진전된 이야기가 오고 가기도 했지만 극영화의 매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윤리적 재현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제작사들은 두 남자(형사와 범인)가 주인공이 되고, 여성은 오직 피해자, 심지어 사체로만 등장하는 스릴러의 장르적 서사를 원했다. 반면 나는 폭력의 재현이나 이미지의 착취 없이, 여성 피해자가 이야기의 주체가 되기를 원했다. 그런 첨예한 대립에 타협점이 처음부터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다 VR 매체를 만났다. 이 매체의 미학적 기조가 일반 평면 영화와 같은 ‘관음’이 아니라 ‘체험’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관객이 눈앞의 이미지를 관음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영상에서 재현하는 공간의 일부가 되어 체험하게 된다는 것. 그곳에 함께 있게 된다는 것. 그렇다면 폭력을 재현하지 않고 폭력을 이야기하는 역설적 접근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  Virtual Reality, 가상현실
[2] 1992년 10월 28일 경기도 동두천시 기지촌에서 일하던 윤금이(尹今伊, 당시 26세)가 주한 미군 2사단 소속 케네스 마클(Kenneth Lee Markle Ⅲ) 이병에게 살해당한 사건.

<동두천>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처음 머릿속에 전등이 켜지듯 생각난 미학적 모토는 “사체의 부재(the absence of body)”였다. 그 사건의 내용과 시간과 공간을 피해자의 사체가 아닌 사체의 부재를 통해 재현하고 싶었다. 25년 전 내가 본 현장 사진, 이후에도 인터넷에 수없이 떠돌던 그 참혹한 사진, 그 이미지가 재생산되고 파급되던 모든 과정을 되돌리고 그 이미지를 삭제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체가 없는 사건 현장, 폭력이 일어났던 빈방을 VR로 재현하고 싶었다.  

미국에서 기사, 논문, 서적은 물론 미군 내 자료와 간행물에 이르기까지, 힘이 닿는 한 모든 자료를 찾았으나 사건 현장의 방 디테일은 찾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찾은 자료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시 현장을 묘사한 기사를 썼던 기자와 작가들을 접촉하기도 했지만 현장을 직접 보지 않고 사진 이미지를 글로 재생산했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났다. 사건이 일어난 방이 위치했던 건물은 그대로 있었으나 건물 내부가 개조되어 방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원래 생각했던 시나리오를 실현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업 과정에는 또 다른 변수가 있었다. 처음 조사를 시작할 때는 피해자가 살던 1992년 기지촌 모습은 찾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서울 근교의 도시에서 25년이란 세월은 모든 흔적을 없애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닌가. 그런데 막상 리서치를 시작하자 예상과 다른 상황들이 벌어졌다. 동두천 기지촌은 포르말린에 절여진 것처럼 25년의 시간을 초월하여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윤금이 씨가 사건 당일 미군을 만났던 크라운 클럽도 영업은 중단된 상태였지만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60년대 풍의 양장점과 스팸과 프링글스를 주로 판매하는 낯선 구멍가게의 모습은 한국을 뒤흔든 개발의 광풍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밤이 되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미군들이 들어가는 클럽들과 바에서 90년대 초의 음악이 흘러나왔고 거리에는 기계총을 멘 미군과 한국군이 순찰을 돌았다. 2016년의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풍경들이 버젓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같은 지역을 거듭 답사하고 몇 번의 크고 작은 위험한 상황들을 겪고 나니, 2016년 현재 이 지역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 ‘윤금이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2016년 동두천 기지촌의 모습을 담아내는 동시에 1992년 있었던 ‘윤금이 사건’을 시적으로 재현하는 시나리오를 새로 구성하게 되었다. 


<소요산> 작업 시 <동두천> 작업에서 깨달은 무언가를 새롭게 반영한 부분이 있을까요?  

<동두천>을 만들며 깨달은 것은 3D 360도로 촬영된 이미지가 문자 그대로 실감형/몰입형 경험(immersive experience)을 관객에게 제공하기에 공간을 아카이빙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소요산>에서는 소요산 낙검자 수용소를 VR 매체에 담아내는 것이 수용소에 갇혀 강제 치료를 받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과 함께 주된 목표가 되었다.  

소요산 낙검자 수용소는 미군 위안부 문제를 언급할 때마다 이야기되는 곳이라 <동두천> 사전 답사 당시 가장 먼저 방문하기도 했던 곳이다. 처음 건물 앞에 서서 느낀 것은 서늘함 이었다. 오래되고 낡아 을씨년스럽구나, 하는 느낌이 아니라, 이 건물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건물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그런 냉기. 내부는 보행이 어려울 정도로 쓰레기가 가득 차 있었다. 노숙자들의 숙소로,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의 파티장으로, 유투버들의 촬영장으로 사용된 흔적이 모두 쓰레기로 남아 썩고 있어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건물의 훼손 상태도 심각했다. 2020년 역대급 장마 이후에는 과연 이 건물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2020년 여름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영화 제작이 수월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을 강행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루가 다르게 문짝과 창틀이 사라지고 비 온 후 버섯처럼 벽마다 그라피티가 쑥쑥 솟아나는 상황에서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VR과 영화의 내러티브 구축에 차이가 있다면 어떤 부분일까요? <동두천>과 <소요산>의 이야기는 어떻게 구성하고, 시작과 끝을 설정하는 기준은 어떻게 세우셨는지 그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VR영화와 일반 2D영화의 내러티브 구축의 차이는 엄밀히 말해 연출자와 관객 사이의 권력관계가 달라지는 것이다. 2D극영화의 연출자는 프레임 바깥의 세상을 다 배제할 수 있고, 편집을 통해 관객이 순차적으로 무엇을 보고 생각하고 느낄지 미리 정해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360도 몰입형 매체는 그런 통제가 불가능하다. 이런 VR의 특성에 반감을 느끼는 영화감독들도 많지만 나는 VR의 이런 점이 혁명적이라고 느꼈다.

다행히 실험연극 연출을 해본 경험도 있어서 관객(=VR 카메라의 위치)이 가운데에 앉아 있고 관객을 중심으로 배우들이 앞/뒤/옆 어디서든  튀어나와 극을 이끌고 가는 방식에도 익숙했다. 다만 영화적 매체의 시간성이라는 것만은 놓치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다 보니 대학원 시절 멘토였던 제임스 베닝(James Benning)의 랜드스케이프 시네마(Landscape Cinema) 서사 구조와 비슷한 전략을 사용하게 되었다. 씬 안에서의 컷은 불가능하니, 공간이 바뀌며 이야기가 진전되는 서사 방식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동두천>에서는 피해자의 이동 경로, 그 공간의 점진적 변화가 서사의 축이 되었다. 윤금이가 살해된 밤, 가해자는 크라운 클럽에서 그녀를 만나 숙소이자 일터인 그녀의 방으로 따라와 살해했다. 그리 크지 않은 기지촌 중심가에서 그 이동 경로의 가짓수는 많지 않았다. 든든한 동지가 되어주었던 제작실장 조은석과 조감독 김현승,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이 밤의 기지촌을 돌고 또 돌면서 그 경로를 탐색하고 고민했다. 그렇게 기지촌의 입구(넓고 시야가 트인 공간)에서 시작해 점차 좁아지는 골목으로, 궁극적으로는 윤금이의 방으로 가는 경로로 이어지는 대략 12개의 공간이 서사를 구성하게 되었다.  

<소요산>의 경우는 달랐다. 한 특정 여성이 아닌, 수용소 건물에 갇혔던 다수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했다. 이번에는 수용소 벽에 붙어 있던 일과표, 즉 공간의 이동이 아닌 시간의 점진적 변화가 서사의 축이 되었다. 고풍스런 손 글씨로 적혀 벽에 붙어 있던 수감 여성들의 일과표에는 7시 기상, 7-8시 청소 및 세면, 8-9 조식, 10-11 치료, 11-12 성병관리 교육, 15-17 검진 및 치료 등 빡빡하게 짜인 일과가 적혀 있었다. 이 일과표를 기반으로 수감된 여성들이 감내해야 했던 수용소 내부의 하루를 재구성하는 것이 <소요산> 서사의 기초가 되었다.  

VR 매체와 이야기가 충돌하거나 하나가 되는 순간을 꼽는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일반 2D영화에서 스크린과 관객 사이에 존재하는 심리적 간극을 극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VR영화에서는 그 심리적 간극이 극적으로 줄어들거나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된다. VR의 심리학적 기제는 관음이 아니라 체험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영화를 극장에서 본다면 카메라 바로 앞에 폭탄이 떨어져 사람들이 피 흘리는 장면에서도 관객은 팝콘을 먹으며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몰입형 VR영화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대부분의 관객들은 공포를 느껴 몸을 움츠리거나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   

<동두천>을 만들 때 윤금이의 이동 경로라는 굵직한 서사의 뼈대에 살을 붙인 것은 이런 매체의 속성에 대한 각성이었다. 윤금이는 가해자에게 두부를 가격당한 후 약 2시간 동안 과다출혈로 천천히 죽어갔다. 생애의 마지막 순간, 좁은 방에서 홀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그녀가 의식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느꼈을 극한의 외로움에 대해 생각했다.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에서 그녀가 일종의 생령(生靈)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매일 밤 손님을 찾아 배회했던 거리로 돌아가는 것을 그렸다. 제대로 시작조차 못 한, 허무하게 끝나버린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고 싶은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찾아 거리를 부유하는 것을 상상했다. 그 누군가가 <동두천>의 관객이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무고 방관인으로 동두천 기지촌에 들어온 관객은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시선 언저리를 맴도는 아름다운 여성의 존재를 느끼고, 급기야는 시선에서 자꾸만 빠져나가는 그녀를 적극적으로 찾게 된다. 다음 순간, 좁은 골목에서 여성을 조우하는 관객은 드디어 자신 앞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안도하기보다는 압도당한다. 여성이 계속 관객에게 다가오고 급기야 관객의 몸을 통과한 후, 여성은 비로소 뒤를 돌아보고 관객과 눈을 맞춘다. 합체를 경험한 관객과 여성이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그 순간은 여성이 1992년 자신이 살해당한 공간과 시간으로 관객을 데려가는 초월적 순간이다.

영화는 프레임을 설정하고 감독의 세계를 펼치는 것에 집중한다면 VR은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속에 관객을 풀어두는 것일 텐데요. 그렇다면 VR에서 스토리텔러는 누구일까요?

세계를 구축하고 그 속에 관객을 풀어두는 것…. 정확한 표현이고 아주 멋진 질문이다. 그 안에서 스토리텔러는 연출자와 관객의 상호작용(interaction), 혹은 관계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이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물론 작품마다 다를 수 있겠다.

그러면 <동두천>과 <소요산>의 스토리텔러는 누구일까…. 화면 속 세계에 분명 존재하나 관객이 늘 볼 수는 없는 비존재적 존재(spectral figure), 유령 혹은 귀신이라고 불려도 무리가 없을 법한 여성이 스토리텔러다. <동두천>에서는 윤금이를 상징하는 한 여성이 유령처럼 거리를 떠돌며 관객과 숨바꼭질을 한다. 그녀가 처음부터 관객의 시선을 끌지는 못한다. 행인의 한 명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다가 그녀는 점진적으로 관객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주도한다. 그녀의 모습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거나 놓치는 관객은 이야기를 따라갈 수 없다. 스토리텔러는 그녀 자신이다.

 <소요산> 역시 낙검자 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여성들을 대변하는 한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창백하고 깡마른 자신의 현신을 관객 앞에 드러내기 전까지 그녀는 오직 작은 물소리로만 스스로의 등장을 알린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그녀가 나타날 때마다) 관객은 소요산 낙검자 수용소의 모습이 변하는 것을 목격하며 그녀가 감내했던 시간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텅 비어 있던 침실에 나란히 개켜진 군용 담요가 서서히 나타나고, 깨진 유리창 사이로 초록빛 잎새만이 살랑이던 빈방에 부인과 검진대가 나타난다. 사운드로만 관객을 리드하던 그녀는 어느 순간 현신하여 관객에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한다.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관객은 눈앞에 보이는 시공간의 의미와 연결성을 이해할 수 없다. 스토리텔링은 오로지 관객과 그녀 ‘사이에서’ 양자 간의 상호 관계가 설정됨에 따라 완성되는 것이다.

<동두천>과 <소요산>에서 관객이 어떤 경험을 하길 기대하셨고 실제 관객 반응은 어떠했나요?

미군 위안부라는 거대한 숙제가 지식이나 정보가 아닌 감각으로 와닿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군 위안부에 얽힌 복잡하고 정치적인 이슈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누구도 감히 부인할 수 없는 이 여성들의 빼앗긴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런 작은 VR 작품으로 그렇게 큰 이야기가 전달이 될까 반신반의하면서도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나 사전 지식 없이도 그냥 피부로, 귀로, 가슴으로 여성들의 고통이 느껴지기를 바랐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관객들은 그렇게 느껴주었다.

많은 설명이 없는 함축적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미군 위안부 문제를 접할 기회가 없었던 관객들의 충격은 상당했던 것 같다. 남한에 미군이 아직도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외국 관객들에게는 특히 더. 제재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작품을 상영하는 미술관과 영화제들은 관련 행사를 자체적으로 기획하기도 했다. 암스테르담의 아이영화박물관(Eye Film Museum)에서 작품의 상영과 함께 주한미군문제의 역사와 영화적 재현에 대한 특별 패널을 기획했던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다수의 국제 영화제와 해외 미술관의 상영과 전시를 통해 세계 각국의 다양한 관객들에게 작품을 선보이며 주목할 만한 사안을 발견했다. 관객의 성별과 인종, 국적에 따라 작품을 보며 느끼는 주요 정서가 확연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특히 <동두천>의 기지촌 모습, 그 기지촌 거리에 있는 것(VR영화이니 보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것이다)만으로도 공포를 느끼는 관객들이 있었는데, 이 공포의 반응 정도는 아시아 여성(특히 한국)일수록 심했고 백인 남성이 가장 덜했다. 예를 들어, 한국 여성 관객들의 대다수는 기지촌에 어둠이 내리는 장면부터 극렬한 공포를 느꼈다고 했으나 백인 남성들이 느끼는 주 정서는 슬픔이었고 공포를 느끼지는 않았다는 피드백이 대부분이었다. 아시아 여성 중에서도 식민강점기를 겪은 국가의 여성들은 그렇지 않은 국가 여성들에 비해 더 강한 공포 반응을 보였다. 후기식민/제국/자본주의 세상의 권력관계에 따른 인종/국가/젠더별 반응이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다르게 나타나는 것에 놀랐고…슬펐다. 

이미지, 혹은 영화와 감독님과의 관계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미술을 전공하고 영화를 만드는 여정이 창작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미술을 전공하면서 배운 것은 시각 언어를 읽고 쓸 줄 알게 된 능력(visual literacy)이다. 양질의 이미지들을 보고, 분석하고 자신의 시각 언어로 소화시켜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훈련은 의미 있는 교육이었다. 또 당시는 미학 이론이나 미술사 공부를 상당한 강도로 시켰는데 닥치고 암기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웃음) 예를 들어, 동양미술사 수업 하나만 해도 몇천 장의 슬라이드(그림)를 암기해야 했고, 시험 문제는 그 슬라이드 중 한 그림을 골라 그림의 작은 부분을 확대하여 보여주고 그 그림이 어느 시대의 작품인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서술하라는… 뭐 그런 식이었다. 그러니 사실은 암기만 하면 되는 일은 아니었고, 자연히 한 개인의 붓놀림 하나가 그가 그리는 그림에 투여하는 신체성 (physicality), 수묵의 농담(濃淡)에 묻어나는 작가의 개성,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들이 필연적으로 담아내는 시대정신, 그런 것들을 의식하고 고민하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수업이 예술사회학 수업인 셈이었다.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대학교 4학년 때 비디오 아트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이라 영상 매체의 속성과 그것이 시사하는 가능성에 큰 의미를 두었던 것 같다. 미술관에 걸려 유일무이한 타블로로만 존재할 수 있는 그림과 달리, 영상 매체는 한마디로 “대중복제시대의 예술”이라는 점에 매료가 된 거다. 아이폰으로도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요즘에야 영상이 정말 대중적인 매체가 된 것이지만 당시에는 사실 그렇지는 않았고 언젠가 그럴 수 있겠다는 ‘징후’만을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디오라는 신기술을 통해 영상 매체라는 것이 21세기에는 얼마나 폭발적으로 발전할 것인지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촬영을 위해서는 특수 장비와 인력, 자본이 필요한 필름 카메라와 달리 가볍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소형 비디오카메라가 주는 매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1960-70년대 초기 비디오 아티스트와 미디어 액티비스트의 작품들을 섭렵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내 영화 인생의 시작이 되었다.

소셜 미디어나 발전한 매체 기술로 인해 사적인 삶을 표출하는 형태가 보편화되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를 어떻게 보시나요?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가 완성된 2002년 이후, 이 작품에는 여성주의 사적 다큐멘터리, 성장영화, 퍼포먼스 비디오아트, 소셜 미디어 시대를 예견한 실험, 등 여러 가지 라벨이 붙어 다닌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내가 보는 관점은 이 비디오 일기가 촬영되었던 시기 한국 사회의 젠더 기상도이다.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은 한국영화가 남성화/산업화되던 시간이다. 97년에는 한국영화사에 획을 그은, 소위 대형 남성 감독들이 한꺼번에 등단하기도 했고 한국영화의 산업화는 99년 배급된 영화 <쉬리>로 물꼬가 터졌다. 그러나 그 속에 여성은 없었다.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심화된 21세기 현 한국 사회의 젠더 갈등은 여성의 목소리가 완전히 배제되었던 이 시기의 영화들 안에 이미 예견되어 있다.

한국이라는 후기 식민 사회가 (제국주의 피지배자로서의 상대적 여성성을 극복하고) 남성성을 되찾는 이 시기에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가 촬영되고 편집되었다는 사실은 무척 의미심장하다. 당시 미국의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있던 내가 받은 예술 교육 안에는 백인 중심의 유럽이 있었고, 부흥하는 모국의 문화에는 남성만이 존재했다. 그 시기 나는 학교의 과제로는 유럽식 모더니즘 실험영화를 제작했다. 하지만 집에 오자마자 숨을 몰아쉬다시피 하며 카메라를 켜고 비디오 일기를 촬영했다. 내가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 부끄러웠고, 왜 이토록 절박하게 강박적으로 일상을 기록하려 하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꽤 최근에 그때 노트에 적었던 메모를 발견했다. 지금 읽어보니, 후기 식민 사회에서 여성으로 존재하는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수 없는 괴로움을 그렇게 표출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 메모에는 “지금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언젠가 미래의 누군가는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 괴로움이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 어떻게든 일단 기록하고, 타임캡슐처럼 보관해 놓았다가 나중에 의미를 찾겠다는 것이다. 그런 타임캡슐들을 나중에 열어 결국 편집까지 하게 되었고 여러 이론가들에 의해 그 의미가 분석되었으니 어떻게 보면 예측이 맞았던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가 현재 소셜 미디어를 통해 소비되는 사생활 동영상과는 같은 면보다 다른 면이 더 크다고 본다. 나르시시즘이 자기 정체성을 찾는 동력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 카메라 렌즈가 세계를 향한 창인 동시에 자신을 옭아매는 감옥이라는 점에서는 유사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 다만,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는 즉각적인 소비와 전시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 피드백(이미지의 소비자)에 의해 조종되지 않는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어쩌면 상당히 본질적인 차이일 수도 있겠다. 

그간 다양한 매체로 여성의 몸,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야기에 맞는 매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감독님의 작품을 예를 들어 어떤 지점이 각 매체와 맞아 떨어졌나요?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는, 제목 그대로 ‘비디오’ 일기이다. 비디오라는 매체가 없었으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작품이다. 여타 이 시기에 만들어진 단편 비디오 작업들은 모니터에 아날로그 카메라를(지금은 찾을 수 없는 VHS-C 카메라를 사용했다) 연결하고 스스로를 모니터링, 혹은 감시하면서 촬영한 작업이다. 내가 나를 보고, 내가 나를 연출하고, 내가 나를 촬영하는, 주어와 목적어가 같은 폐쇄회로 작업이다. 돌이켜 보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라는 모토 아래 활약했던 여성주의 작가들의 전략, 또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언급한 대로 나르시시즘을 심리적 기제로 사용하는 비디오 아트의 미학에 닿아 있었다.

<그 집 앞>의 과정은 달랐다. 극도로 미니멀한 스타일의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영화의 전통적 제작 방식을 필요로 했다. 이전의 폐쇄회로 비디오 작업 방식을 버리고 세상 속으로 카메라를 들고 나서야 했다. 전문 제작진이 필요했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수준의 예산이 필요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내게 매체의 변화 또한 일으켰다. <그 집 앞>은 예산 절감을 위해 HDcam 카메라로 촬영되었으나 극장 배급을 위해서 35mm 프린트로 전환되었다. (디지털 비디오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Celluloid is dead – 필름은 죽었다”라는 선언이 나오던 시대였으나, 극장 배급을 위해서는 결국 35mm 프린트가 필요했다!)  비디오/필름 매체 전환의 과도기는, 창작자로서 논픽션과 픽션, 실험영화와 전통적 극영화의 간극을 좁혀가며 좀 더 대중적인 방식으로 여성의 욕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내 성장의 시기와 맞아떨어지고 이는 물론 우연이 아니다.

이후, <두번째 사랑>에서는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전통적인 방식의 서사를 선택했다. 당시 상업극영화를 처음 찍게 되면서 나는 장르와 매체가 가지는 전통의 전복을 원했다. 욕망을 가진 여성은 끝내 처벌받고야 마는 60년대 한국 멜로드라마 영화의 서사에, 할리우드 영화 속 아시아 남성들의 무성화(無性化)된 전형에,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백인 여성과 아시아 남성의 정사 신을 터부시하는 영화사의 전통에 도전하고 싶었다. (당시까지 주류 영화사 속에서 그런 조합을 찾을 수 있는 예는 알랭 레네(Alain Resnais)감독의 <히로시마 내 사랑>과 쟝자크 아노(Jean-Jacques Annaud) 감독의 <연인>뿐이었다.) 이 모든 고착적 영화 전통에 질문을 던지는 정공법으로, 35mm 필름을 선택했다.

여성의 몸과 욕망을 다루지는 않았으나, <서울의 얼굴> 역시 매체에 대한 고찰이 담겨 있는 작품의 예다. 하드다스크에 이미지를 저장할 수 있는 기술이 안정화되고 완전한 디지털 비디오의 시대가 열리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1995년부터 2007년까지 틈틈이 촬영해 왔던 서울의 이미지들을 모아 하드디스크에 모아들이는 작업이었다. VHS-C 테이프, 6mm 테이프, 디지털카메라의 스틸 사진 등, 10년 남짓한 세월 동안 매체의 발전과 함께 포맷이 달라진 이미지들이 편집되어 에세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서울의 얼굴>이었다. 이 영화의 내레이션은 프랑스 출판사에 의해 한국어, 불어, 영어의 3개 언어를 담은 포토 에세이 서적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당시 서적판에 큰 기대가 없었던 나는 책을 받아보고 깜짝 놀랐는데,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들을 수 있도록 삽입된 QR코드가 책도 영화도 아닌 새로운 청각 매체를 독자적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프레임이 사라진 VR 작업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있지만, ‘윤금이 사건’이나 소요산처럼 매우 조심스러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감독님은 카메라의 시선을 어떻게 세팅하시나요?  

나는 몸으로 영화를 만든다. 오죽하면 미국 듀크대에서 준비하고 있는 회고전 제목이 <The Embodied Cinema of Gina Kim (김진아의 체화된 영화)>이다.  카메라의 시선을 예로 설명하자면, 나는 내 몸이 제공하는 직관에 따라 카메라의 위치를 정한다. <동두천>에서 마지막 방 씬의 카메라 높이에 대해 많은 평론가들이 언급을 했다. 참으로 애매한 높이의 시선(카메라의 위치)으로 인해 관객 자신이 마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가 되어 공간 속을 부유하는 듯이 느껴진다는 평이 많았다. <소요산> 역시 계단에 여자가 앉아 있는 복도 씬이나 옥상 씬, 침실 씬 등에 따라 카메라 높이가 미묘하게 다르다. 그걸 일일이 이론화하자면 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생각하고 계산해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순간적으로 또 직관적으로 이것이 맞다, 라고 생각되는 위치에 카메라를 놓고 앵글을 잡는다. 극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집 앞>에서 여성 주인공이 자위행위를 하는 6분 롱테이크는 극도로 타이트한 클로즈업으로 얼굴만을 어루만지듯 보여준다. <두 번째 사랑>에서 정사 씬들을 촬영한 카메라의 위치는 남녀 주인공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에 따라, 두 사람의 역학 관계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카메라의 시선을 결정하는 순간이 오면 나는 그 피사체를 내 몸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건 어쩌면 내 첫 작품이었던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에서 유래한 접근 방식이 아닐까. 내게는 카메라로 무언가를 촬영한다는 행위 자체가 ‘보존’의 시도이고 상징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포옹’의 시도이다. 그런 행위에는 당연히 시간을 거슬러 망각으로부터 지켜내고 껴안고 싶은 피사체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담겨 있다. 조금 위험한 발언을 하자면, 생명을 키워낼 수 있는 여성의 몸을 가진 내가 촬영하는 피사체는 어쩌면 다 나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태도는 나쁘게 말하면 공감 과잉의 산물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미지를 착취하거나 대상화하는 방식과 다른 방식임에는 틀림없다.

재현의 윤리학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감독님이 부딪힌 딜레마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있다면 어떤 부분이 있을까요?

좋은 예술에 있어 형식과 내용은 분리될 수 없다. 이 내용을 이 형식으로, 이러한 미학적 전략으로 풀었더니 성공적인 작품이 되더라 해서 또다시 비슷한 내용의 작품에 그 형식을 편리하게 적용해서 쓰면 다시 성공적인 작품이 자동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좋은 예술 작품에서 형식과 내용의 관계는 화석처럼 표본이 되어 공식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동력 관계이다. 이 방법이 옳구나! 결론 내려 만병통치 공식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여기저기 적용하기 시작하는 순간, 예술은 썩어 들어간다. 

재현 윤리에 있어 일반론을 말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대상의 이미지를 착취하지 않는다’, ‘관객에게 공감을 강요하지 않는다’ 등등 여러 일반론이 있겠지만, 이런 일반론은 원칙일 뿐, 개별화된 구체적인 사안에 적용하려 들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진다. 영화를 만들며 만나는 인물들과 장소, 사건들은 모두 고유한 개별적 상황이며, 그 상황을 영화적 매체에 담아내며 부딪히는 딜레마 역시 그렇다.  주제와 주제를 구현하는 대상, 사용하는 매체에 따라 매번 새로운 윤리적 관계를 정립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하지만 역으로 그렇게 재현 윤리의 일반론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첫걸음이 될 수는 있겠다. 창작은 계속 변화하고 살아서 움직이는 ‘과정’이다. 그러니 매번 힘들게 답을 찾는 것만이 답이다. 재현 윤리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어려운 매듭은 어렵게 푸는 것이 맞다.

그래서 오히려 좀 마음을 비우는 것도 중요하다. 의미 있는 일을 하려고 애쓰는 것은 나만이 아니며, 나는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그것이 크게 보면 얼마나 사소하고 작은 일인지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방법만이 옳지는 않다는 것, 심지어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작업해 나가는 것도 도움이 된다.

당장 어제 일어난 일이 너무 낡은 뉴스인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에 30년이나 지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미군 위안부 문제를 낡은 이야기나 지나간 이야기라고 보지 않는다. 현재진행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축소되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도 대한민국에는 미군 기지가 있고 그 주변에 미군의 편의를 위해 세워진 기지촌들이 있다. 대부분의 기지촌 안에 한국 여성들은 이제 없지만, 외국인 성 노동자 여성들이 지금도 그 안에서 일하고 있다. 이렇게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하기 어려운 이야기이고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문제이기에 자주 언급되지 않는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 내에서는 진영을 떠나 모두에게 불편한 진실이고, 한국 밖에서는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는 미군의 심기를 거스르는 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이기 때문에 언제까지고 눈을 감고 덮어둘 수 있을까? 한때 남한 가용 면적의 17퍼센트를 넘었다는 미군 기지와 지금도 존재하는 기지촌, 60년대 남한 GNP의 25퍼센트를 외화로 벌어들였다는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한국의 오늘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강자만을 대변한 역사, 피해자의 입장에서 서술되지 않은 사건, 청산되지 못한 범죄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이다.  

현재 구상 중인 새로운 매체나 차기작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새로운 매체 작업이라면 아마 AI를 이용한 작업이 될 것 같다. 미국에서 최근 일어나고 있는 동양인 혐오 범죄는 상상을 초월한다. 미국 사회가 이렇게까지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해 적대적인 혐오 사회가 된 이후 차별이라는 것, 반대로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관용이라는 두 가지 화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밝힐 수 없지만 인공 지능 기술과 MR[1] 기술을 접목해서 인종 차별에 관한 심리 분석적 작업을 하게 될 것 같다.

그러나 더 먼저 완성될 차기작은 미군 위안부 3부작의 마지막 3부일 것 같다. <동두천>과 <소요산>을 만들면서 기지촌의 지리적 물리적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촬영을 해야 한다는 시간적 압박을 많이 느꼈다. 3부를 준비하면서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현재 준비하는 3부도 앞서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공간이 중요한 작품인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지역 전체가 곧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이미 사라진 부분을 시각적으로 복원하기 위해 손상되어 일부만 남아 있는 건축물이나 공간을 디지털로 복원하는 기술, 여러 AR[2] 기술 등을 실험 중인데, 어쩌면 아이러니하게도 세 작품 중 가장 시각적인 작품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미군 위안부에 관한 장편극영화 작업도 추진 중이다. VR 3부작을 만들면서 같은 주제를 장편극영화로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어렴풋한 계획과 용기가 생겼다. ‘윤금이 사건’이 있었던 1992년 이후, 정확히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으니 참 오래 걸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통상 ‘보여주기’에 주력하는 영화 매체를 활용할 때 재현의 윤리라는 게 그만큼 풀기 어려운 문제라는 뜻이기도 하다. 많이 돌아왔지만 과정이 생략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거듭 강조하자면, 어려운 매듭은 어렵게 풀어야 하는 거니까.

[1] Mixed Reality. 혼합현실 
[2] Augmented Reality. 증강현실

이 글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출판된 《보더리스 스토리텔러》의 발췌문입니다. 더 알아보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