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드 이펙트 서울(SFX)의 두 번째 해외 에디션, ‘경청의 단순한 행위들(Simple Acts of Listening)’은 경청 그 자체가 사회정치적 실천이 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제안하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전시를 리뷰 한 김민선은 소위 ‘할로윈 참사’ 직후 헤이그의 웨스트(West)를 방문하고, 애도의 소리에 대해 일부 참여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사운드 이펙트 서울(SFX)은 큐레이터 양지윤과 바루크 고틀리브가 공동 기획한 한국 기반의 사운드 아트 페스티벌이다. 2007년에 시작된 이 페스티벌은 지금까지 단 한 차례, 2010년 대만에서 해외 에디션을 개최한 바 있다. 이번 11월, 웨스트는 두 번째 해외 에디션을 주최하며 ‘경청의 단순한 행위들’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작품들을 소개한다. 이 작품들은 경청이 사회정치적 실천이 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제안한다. 참여한 작가들은 모두 '한국인'으로 분류될 수 있지만, 이들 모두는 이민자로서 현재 혹은 과거에 다른 나라에 거주해온 이들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또한 웨스트가 과거 미국 대사관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오늘날 한국이 미국의 실질적 점령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한국의 현재 사회, 경제, 문화적 조건은 모두 미국의 준식민적 지위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약 한 달 전인 10월 29일,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이태원에서 열린 할로윈 축제 도중 158명이 압사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태원은 1950년부터 미군기지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다. 점령 이후, 외국인 인구가 해당 지역에 증가하면서 수많은 레스토랑, 유흥업소, 기타 오락 공간들이 문을 열게 되었다. 이번 할로윈 참사는 단연 사회적 재난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한국 정부가 국민의 안전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더욱이, 이는 2014년 세월호 침몰이라는 집단 트라우마에서 여전히 회복 중인 한국 사회에 발생한 일이었다. 마치 이번 재난에서 촉발될 수 있는 항의의 소리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듯, 정부는 참사 직후 일주일을 ‘국가 애도 기간’으로 지정했다. 이 기간 동안 예술 전시, 공연, 행사는 취소되었고, 애도의 윤리적 검열 속에서 사운드 아트는 종종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 예술의 소리는 애도의 소리에 가장 가깝다. 사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묻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 이보다 더 적절한 소리가 있을까?
김진아, <소요산>. 사진: 조에코 / 웨스트 덴 하그
오프닝 퍼포먼스 <REUS>, 이슬기. 사진: 조에코 / 웨스트 덴 하그
지금 이 순간, 이보다 더 적절한 소리가 있을까?
네덜란드에서 유학 중인 한국인으로서, 나는 한국에서 애도가 강하게 통제되던 바로 그 주간에 어느 때보다 많은 워크숍과 행사에 참여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과 내가 느끼는 슬픔이 좀처럼 일치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많았다. 최근 미술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이나 동료들과 나누는 대화는 대부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제국주의 침공이나 이란 여성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정치적 긴급성은 각자의 친숙함이나 거리감에 따라 서로 다른 주파수로 공유된다. 나 역시 그런 모든 정치적 긴급성을 깊이 중요하게 여기고, 또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지만, 이 애도의 주간 동안 나는 단지 ‘경청’에 그치지 않고 ‘말하기’의 방식을 찾게 되었다. 나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동시에 내 마이크를 들고 내 우려를 목소리로 낼 수도 있을까?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한 일일까?
그때 나는 우연히 ‘경청의 단순한 행위들(Simple Acts of Listening)’ 전시 소식을 접했다. 나는 학우들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고, 중국인 친구인 커신이 함께 하겠다고 했다. 커신은 요즘 중국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폭력 앞에서 깊은 무력감을 느끼는 학생이다. 그녀는 지금 중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적·문화적 상황을 유창하게 번역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번 전시가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방식의 만남을 가져다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전시를 향했다.
우리가 웨스트에 도착했을 때, 패널 토크는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관객은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한국인이라는 것은 곧 알아챌 수 있었다. 토크에서는 큐레이터 양지윤과 바루크 고틀리브가 이번 SFX 에디션의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이후 하차연, 이슬기, 권병준 작가가 각자의 작품을 소개했다. 하차연은 공동체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의 이야기를 담은 <매트, 보트, 카펫(MAT, BOAT, CARPET)>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흘렸다. 이어 발표한 이슬기는 바로 발표를 시작하지 못하고 잠시 마음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 순간, 나 역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옆에 앉아 있던 커신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나의 눈물이 그녀에게 동행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느끼는 공감은 같은 문화권이나 같은 지리적 배경이 아닌 그녀를 포함하는가, 혹은 배제하는가? 혹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아시아 디아스포라 여성들 사이에 더 넓은 연대가 가능할까? 나의 이 감정, 이 눈물은 과연 어느 정도의 ‘거리’를 갖고 있는 것일까?
김진아, <소요산>. 사진: 조에코 / 웨스트 덴 하그
나의 눈물은 어떤 거리를 두고 있는가?
전시된 작품들 중에서 가장 명시적으로 한미 간의 준식민적 관계에 주목한 작품은 김진아 감독의 <소요산 (Tearless)>였다. 이 작품에서 김진아 감독은 잊혀진 여성들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소요산>는 가상현실(VR) 영화이며, 증강현실(AR) 개입도 함께하는 작업이다. 이 영화는 특정한 서사를 제시하기보다는, 관객을 한국 동두천에 위치한 이른바 '몽키 하우스'라 불리는 공간으로 생생하게 이끈다. 이곳은 미군을 상대로 성노동을 강요받던 여성들이 성병에 감염되었을 때 강제로 수용되었던 감금시설이다. '몽키 하우스'라는 이름은, 자유를 외치며 갇혀 있던 여성들의 모습을 동물원 원숭이에 비유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비전문적이고 위험한 방식으로 페니실린 주사가 투여되었고, 일부 여성들은 약물의 쇼크로, 혹은 탈출을 시도하다 건물에서 뛰어내려 사망하기도 했다. 관객은 복도, 침실, 욕실, 치료실 등 다양한 공간을 지나며, 누군가가 실제로 이런 감금 상태에서 살아야 했다는 사실을 상상하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의해 성노예가 된 '위안부'와 달리, 이 여성들은 ‘성노동자’, ‘양공주’로 불렸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미군을 상대로 일했다는 오해가 널리 퍼져 있었고, 이는 2018년 서울고등법원이 한국 정부와 미국 모두에게 성착취 시스템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미군은 한국 법의 바깥에 존재해왔고, 그로 인해 강간과 살인 피해가 다수 발생했다.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는 바로 이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이다.
<소요산>을 전 미 대사관이었던 공간에서 상영하며, 김진아 감독은 이 '역사'를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질문하고 주목하게 만든다.
하차연, <매트, 보트, 카펫> - 나의 매트, 가족을 위한 보트, 모두를 위한 큰 카펫.
사진: 조에코 / 웨스트 덴 하그
<매트, 보트, 카펫 (MAT, BOAT, CARPET)>은 두 개의 비디오와 로프로 연결된 플라스틱 병들이 놓인 설치 작업이다. 두 영상은 서로를 마주 보며, 각각 파도 소리와 풍경을 담고 있다. 병과 로프를 따라가다 보면 두 개의 다른 방에 이르게 되는데, 그곳에는 매트, 보트, 카펫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이 비디오와 설치는 함께, 한 사람이 자신이 속한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암시한다. 매트는 이동 중 최소한의 공간에서 머물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작은 배는 공동체의 이동을, 그리고 마법의 양탄자는 하늘을 날아 목적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망을 상징한다.
개막 당일, 나는 하차연 작가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우리는 며칠 전 서울에서 벌어진 참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이 2014년 세월호 참사에 대한 감정을 되돌아보는 방식이기도 하다고 설명해주었다.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적 상처 말이다. 어쩌면 그녀는 플라스틱 병을 통해 자신이 마법의 양탄자가 되어, 세월호 침몰로 인해 바다에 잠긴 젊은이들에게 날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투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 병은 그녀가 그리워하는 어떤 장소로 돌아가고자 하는 바람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이 작업은 작가가 독일과 프랑스에서 40년 가까이 살아온 이력이 더해지며, '이동 거리'라는 주제와도 깊이 겹쳐진다.
전시장을 떠나며, 커신은 이번 오프닝이 마치 "우리의" 파티 같았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의 다른 전시 오프닝들과 달리, 대부분의 관람객이 아시아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지만, 동시에 이 전시가 제기한 질문들 — 특히 한국과 미국의 관계에 관한 문제 — 이 훨씬 더 넓은 곳에 도달하길 바랐다.
지금 이 시점의 나에게 이 전시는 ‘깊이 듣기’를 위한 하나의 연습이었다. 사실, 경청의 단순한 행위들은 자본주의적 효율성의 이상에서 멀리 떨어진, 일종의 지연된 경청 혹은 지연된 깊은 경청의 방식을 제안한다. 전시된 경청의 행위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이 글은 그러한 경청들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데 작게나마 보탬이 되고자 하는 나의 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