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 순간이동

Published December 12th, 2024 - Source

국립현대미술관

김진아 감독은 영화와 미디어 작품을 통해 영화적 서사의 변혁과, 사회 정의에 대한 초국가적 시각의 지평을 넓혀왔다. 〈두 번째 사랑〉(2007), 〈파이널 레시피〉(2014) 등 다섯 편의 장편 영화와 유수의 미디어 아트는 칸, 베니스, 베를린 등 200개 이상의 국제 영화제와 뉴욕현대미술관, 퐁피두 센터, 국립현대미술관 등의 미술관에서 상영되었다. 2016년부터 8년간 제작된 〈미군 위안부 3부작〉은 역사적, 정치적 이슈를 감각적 경험의 세계로 풀어낸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동두천〉(2017), 〈소요산〉(2021), 〈아메리칸 타운〉(2023)에 이르는 3부작 모두 베니스 국제영화제 VR 경쟁 부문에 진출했고, 베니스 영화제 VR 베스트 스토리상, 제네바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아시아 여성 최초로 하버드 대학교 시각예술 학과에서 영화제작과 이론을 강의했고, 2014년부터는 UCLA 영화과 종신교수로 재직하며 시각예술의 재현 윤리, 초국가적 영화론 등을 가르치고 있다.

VR 3부작 <동두천>(2017), <소요산>(2021), <아메리칸 타운>(2023)은 미국 위안부 이슈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각 작품 모두 특정한 한 공간을 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동두천>은 동두천 기지촌, <소요산>은 동두천 낙검자 수용소, <아메리칸 타운>은 군산 미군공군기지 주변 기지촌이 배경이다. 미국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대학교 1학년때 윤금이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 학내의 대자보에는 사건의 설명과 함께 살해당한 여성의 사체가 공개되었다. 이후 그 이미지는 시위를 하는 우리 모두가 들고 있던 전단지의 한장 한장에 무한 복제되었다. 피해자의 인권은 대의를 위해 무참히 짓밟혔다. 참혹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이미지를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삭제해 주는 일 뿐인 것 같았지만 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강렬한 분노를 느꼈지만 그 분노를 표현할 언어가 당시로서는 없었다. 조악한 흑백사진 아래 적힌 도발적인 슬로건과 엉터리 영어 문구들은, 나에게 후기식민사회에서 살고 있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뼛속까지 낙인 찍었다. 이미지에 속한 인권, 재현의 윤리에 대한 아무 논의 없이 시위가 지속되는 동안 내가 느낀 분노와 무력감은 결국 피해자에 대한 부채감으로 내면화 되었다. 이후 한국인 여성 예술가이자 교육자로 미국에서 활동 하면서 제국주의, 식민주의가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제 3세계의 경제를 착취할 때 여성의 몸에 벌어지는 비극에 대한 자각은 더 첨예 해졌다. 이런 일련의 사유들이 예술가로서의 내 정체성을 만들었다.


<동두천>과 <소요산>에서 관객이 인물과 풍경, 사건 직후에 현장을 찾은 형사, 혹은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미행하는 인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고 느꼈다. <아메리칸 타운>에서 영화 속 인물이 “누구세요?” 라며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환한 대낮의 골목에서 “누구세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현장의 관찰자이자, 사건의 참여자로 시점이 급 변환되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2017년부터 2023년까지 긴 시간에 걸쳐 작품을 제작하면서 관객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변화가 생긴 것인가?
 

남한에는96개의 기지촌이 있었지만 그 대부분이 이미 사라졌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지고 있다. 삼부작을 마무리하며, 단순히 관객에게 공감과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종용해야 한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동두천과 소요산은 강렬한 정서를 환기시켜 의식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정서적 작품이다. 모종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번에는 다른 접근이 필요했다. 미군위안부 문제가 20세기의 비극을 통과한 타자의 문제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우리 자신의 문제임을 알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울이라는 장치가 중요했다.

처음 <아메리칸 타운> 기지촌을 찾아 갔을 때, 한낮의 태양이 내려 쬐는 무료한 거리에 움직이고 살아있는 사물은 길고양이들, 그리고 거울과 어두운 반사면에 비친 나 자신 뿐이었다. 거울 속에  내 자신과 타운의 모습이 함께 반영되는 것을 보며 거울이라는 사물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뒤통수에 눈이 달리지 않은 인간은 뒤를 볼 수 없는데, 나 자신을 보도록 고안된 광학 도구가 거울 앞에 선 나의 뒤를 보게 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는 클리쉐가 극도로 선명한, 공간적이고 구체적인 명제로 다가왔다. <아메리칸 타운>에서 관객이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할 위치에는 미군위안부 여성이 등장한다. 거울 속에 나타난 그녀는 과거의 사건과 목소리들을 되살려낸다. 그러나 미군 병사가 떠난 빈 방에서 그녀가 나타나길 기다리던 당신은 문득 과거가 아닌, 현재 일어나는 사건의 목격자가 된 것을 깨닫는다. 급기야 그녀가 당신을 알아보고 다가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처음부터 무고 방관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감독님은 ‘윤금이 살해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고, 적절한 표현 매체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한걸로 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동두천>이다. VR을 택한이유에 대해 설명 부탁한다. 

오랫동안, 사건을 회자하는 모든 매체에서 피해자의 사진을 지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지는 이미 무한복제되어 세상에 떠돌고 있었기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화감독이 된 후로는 영상매체를 통해 이 사건을 다시 이야기 하고 싶었다. “보여주지 않고 이야기 한다”는 역설적 명제를 가지고 오래 씨름했지만, 관음을 기조로 하는 극영화 매체에서 이미지의 착취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러다 VR 매체를 만났다. 이 매체의 미학적 기조가 일반 평면 영화와 같은 ‘관음’ 이 아니라 ‘체험’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러자 “absence of body” 라는 명제가 전등이 켜지듯 떠올랐다. 관객이 눈앞의 이미지를 관음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영상에서 재현하는 공간의 일부가 되어 체험하게 된다는 것. 그곳에 함께 있게 된다는 것. 그렇다면 폭력을 재현하지 않고 폭력을 이야기 하겠다는 역설적 접근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74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수상소감에서 “VR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가진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도록 하는 가능성에 주목하며 작품을 구상했다”라고 밝혔다. 여러 해에 걸쳐 VR 영화를 제작하면서 발견한 매체의 장점과 가능성에 대해서 듣고 싶다.  

VR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하다. 실제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마치 실제인 것처럼 가상현실 공간 안으로 들어가 몰입하게 된다. 공간을 지각할 수 있는 감각은 살아있되, 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몸은 사라진다. 이런 주체성(agency)의 박탈이 공포감을 일으키기도 할 정도로 관객은  무장해제 (disarmed), 또는 무방비(vulnerable) 상태가 된다. 이는 온전한 몸을 가진 상태로 영화 속 이야기가 전개되는 공간과는 다른 차원에서 일반 평면 영화를 감상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심리 상태로 관객을 이끈다. 폭탄이 몇 초 간격으로 터지는 전쟁터를 VR로 체험하는 것과 일반평면 영화로 감상하는 것을 상상해 보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이런 심리적 무장해제는 관객이 VR세계 안에 일어나는 사건들에 무심할 수 없게 만든다.

<몽키하우스>는 2층 철창 안에 갇힌 분들이 살려달라고 철창에 붙어 소리지르는 모습을 동물원 원숭이 같다고 붙인 이름이라는 얘기가 있다. 영화의 촬영현장이 모두 실제로 어둡고 슬픈 역사를 담은 곳이라 제작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제작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하다. 

어떤 공간은, 아무런 설명 없이도 이곳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게 한다. <동두천> 사전 답사를 위해 소요산 낙검자 수용소 (몽키하우스)를 처음 방문했을 때 느꼈던 서늘함은 스태프들이 건물 안에 들어가는 것조차 주저하게 만들었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들어가면, 이번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이 산처럼 쌓인 쓰레기가 길을 막아섰다. 몇 십년 동안 노숙자들의 숙소로, 청소년들의 비밀 파티장으로, 유투버들의 촬영장으로 사용된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방치된 건물의 상태였다. 매번 방문할 때마다 창틀이 내려 앉고 천정과 계단이 무너져 가는 것이 보였다. 2020년 역대급 폭우 후로 건물의 훼손상태는 더 심각해졌다. 더 기다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제작을 강행했지만, 판데믹을 고사하더라도 전기와 물이 없는 외딴 폐건물에서의 촬영은 쉽지 않았다.

이번 전시에서는 <소요산>의 배경이 되는 몽키하우스를 XR, AR로, <아메리칸 타운>의 아메리칸 타운을 XR로 만나볼 수 있다.  헤드마운트 디바이스 등의 장치가 있어야 하는 VR에 비해 XR, AR은 관람객의 접근이 비교적 용이하고, 거의 모든 이들이 소지하고 있는 디지털 디바이스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확장성이 높다. 이러한 확장의 계기는 무엇인가? 

판데믹 상황이다. 2부 <소요산> 촬영을 준비하고 있을 때 코로나가 터졌다. 어렵게 제작은 마쳤으나 예상외로 판데믹이 길어지면서 관객에게 작품을 보일 기회가 사라져버렸다. VR에 환호하던 영화제들은 가상현실 부문을 아예 없애 버렸고, 미술관과 갤러리들 역시 얼굴에 대야 하는 디바이스의 사용에 기겁했다. 막막한 상황에서 아주 단순하고 과격한 생각이 떠올랐다. 관객이 영상내의 공간으로 올 수 없다면, 공간을 관객에게 가져다 주면 되지 않겠는가? 고맙게도 <소요산>을 촬영할 때 스캔해 놓은 이미지가 있었다. 그 이미지들을3D로 구축해서 관객이 자신의 휴대폰으로 낙검자 수용소를 호출해 낼 수 있게 하면 되겠다는 심산이었다. 그 과정에서, AR매체는 공간을 아르카이빙 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VR<아메리칸 타운>은 처음부터 AR과 함께 기획했다. 곧 재개발로 사라질 타운을 실제 크기로 모델링 한 XR 아메리칸 타운은, 타운의 중심가 삼거리로부터 사방 150 미터의 공간을 관객이 걸어 다닐 수 있는 XR 작품이다. 에펠 탑, 타임스 스퀘어, 광화문, 그 어떤 공간에서도 아메리칸 타운을 소환하여 현실 공간과 함께 병치하고 아메리칸 타운을 지금, 여기, 우리 자신의 문제로 환원한다.

VR은 기존의 영화와 관객들이 체험하는 방식에서 많은 차이를 보여주었다. 앞으로의 영화들은 어떤 방식으로 관객들과 만나게 될까? 이에 대한 관점이 궁금하다.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어쩌다 보니 비디오 아트, 실험 다큐멘터리, 상업 극영화, 가상현실 영화와XR/AR에 이르기까지, 긴 시대를 관통하며 그때마다 새로운 매체를 골라 작품세계가 진화해 왔기 때문인 것 같다. 일반적인 예측을 할 수는 있겠다. MR/AR을 비롯한 영상이 AI와 좀 더 직관적으로 결합하게 되고, 거기에 모바일과 드론 기술이 더해지면 폭발적인 힘을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초창기 휴대폰과 인터넷이 각각의 기술로는 큰 파장을 일으키지 않았으나 둘을 결합한 스마트 폰은 인류가 불을 발견한 것에 비견할 만큼 큰 사건이었던 것처럼.

그런데 아주 정직하게 말하면, 그런 미래의 기상도가 내게 그렇게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은 자본주의에 잠식될 수 밖에 없고, 그 안에서 예술은 힘과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주류문화의 문법을 만들 것이다. 내게 의미를 지니는 일은, 그 권력의 밖으로 도태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90년대 한국 영화계에서는 아직 낯선 장르였던 비디오 아트를 이용해 여성과 몸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2016년에는 아직 아무도 식민화 하지 못했던 VR이라는 매체를 이용해 20세기의 비극 속에 희생된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처럼. 내가 보고 싶은 영화 또한 카메라 앞에 피사체로 대상화되었던 사람들이 카메라 뒤에 주체로 서서 만들어지는 영화다. 이런 영화들은 당연히 보기 불편하다. 잊고 싶었던 사실들을 기억나게 하면서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니까. 그러나 편리와 안락만을 위해 질주해 온 세상의 끝은 지구온난화와 계급 간의 불평등이다. 불편한 영화가 더 많이 필요한 세상이다. 스피노자가 옳다. 모든 귀한 것은 어렵고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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