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K-21 - 주아노]

Published November 28, 2017 - Source

벤자민 주아노, 불어에서 번역


벤자민 주아노의 Je me souviens와 장-루이 푸아트뱅의 Les ailes d’un ange와 함께, 세계의 거대 도시 가운데 하나인 서울을 향한 전례 없는 여정이 열린다.

이 깊이 있는 다큐멘터리의 장치는 겉보기에는 단순하다. 감독은 한때 떠났던 서울로 가족을 만나기 위해 정기적으로 돌아오고, 그때마다 산책과 만남의 장면들을 촬영해 마치 개인적인 일기처럼 기록한다.


영상으로 쓰인 ‘나는 기억한다’: 15년에 걸친 서울의 기억들

겉보기에 사소하고 우연적으로 보이는 이 이미지들의 집적 속에서, 감독은 하나의 영상 몽타주를 구성하고, 이를 통해 도시, 재현과 예술의 지위, 기억과 정체성, 아버지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유를 엮어낸다. 영화는 가족이 조부의 묘로 향하는 차 안에서, 뒷모습으로 촬영된 아버지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이후 시청 광장에서 감독은 영어 단어 ‘memory’ 가운데 ‘re-’라는 접두사를 포함하지 않는 표현을 떠올리려 애쓴다. 이 기억의 단어를 향한 탐색은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를 교차시키며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감독은 성북동에서 창경궁으로, 동대문 시장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으로, 조계사에서의 부처님오신날에서 국립묘지와 1960년 4월 혁명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이태원으로, 광화문에서 서울타워에 이르기까지 관객을 이끈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하는 단어는 ‘아남네시스(anamnēsis)’다.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은 아버지가 동네의 오래된 이발소를 찾는 모습을 담아내며, 비로소 그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 ‘필름 에세이’는 여러 시기에 서로 다른 카메라로 촬영된 이미지의 질보다도, 드물게 지적인 서술 텍스트로 인해 더욱 매혹적이다. 관객은 감독의 부드럽고 단조로운 목소리에 이내 사로잡혀, 철학적 탐문처럼 편집된 서울이라는 도시의 시공간적 산책에 빠져들게 된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성취 중 하나는, 도시와 개인적 경험을 능숙하게 엮어내며, 단순한 도시 담론을 넘어 재현과 공간의 본질을 포착하려는 사유로 확장시킨다는 점이다. 


도시는 우리를 ‘우리 아닌 것’과 연결한다

영화는 ‘아버지’라는 질문으로 액자처럼 둘러싸여 있다. 초반부에서 아버지는 등 뒤에서, 백미러를 통해 촬영되며 얼굴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마지막에서 감독은 아버지를 오래된 이발소로 데려간다. 이발사는 완벽한 이발의 기술은 아직 이미지로 포착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실험 대상이 되고, 딸은 이를 촬영한다. 실제로 머리 모양에는 큰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이발사는 여전히 완벽을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는 현실을 다루는 영화감독의 인내심 있고 조용한 노동에 대한 은유로 읽힐 수 있다.

감독은 다시 영화 초반의 아버지 이미지를 떠올린다. 사진과 영상의 힘—백미러라는 장치로 상징되는—은 과거의 기억을 현재로 불러오는 능력, 즉 ‘아남네시스’에 있다. 아남네시스는 또한 임상적으로 환자의 과거 병력, 곧 고통의 목록을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하다. 이는 감독이 서울의 장소들을 통해 현대 한국 사회의 주요한 상처들을 호출하는 작업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이 마지막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잊혀졌던 ‘기억’이라는 단어에서 시작된 탐색을 마무리하는 방식이다. 이는 기억의 망각, 다시 말해 동시대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기억 상실에 대한 간접적인 암시일까? 동시에 이 다큐멘터리의 또 다른 잠재적 주제—아버지의 문제—를 강조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전통과 정체성, 이름을 찾는 탐색을 통해 감독은 부성(paternity)을 근대성과 연결시키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우회적으로 던진다. 포스트모던한 맥락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부모의 ‘자식’, 다시 말해 그들의 상속자가 될 수 있는가?

여기서 서울이라는 도시는 단순한 배경이나 사유의 계기가 아니다. 그것은 아남네시스의 작업 자체를 상징한다. 도시는 개인적 기억과 집단적 기억, 세대와 시간, 역사와 이야기, 다양한 정체성과 장소, 이름,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도시와 서사

이 형이상학적인 영상적 방황을 통해, 영화는 신체적 현존과 공간의 문제 또한 다룬다. 도시는 끊임없는 변형 속에서도 늘 현재형으로 존재하며 스스로를 되살리지만, 우리는 그 사이에서 사라져간다. 초반의 한 장면에서 감독은 유년기의 동네가 너무도 변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여기’라는 장소의 존재론적 의미를 자문한다. 이에 대한 감독의 응답은 다음과 같다. 예술영화는 도시처럼, 사진처럼, 그리고 물리적 지지체를 가진 모든 재현의 형식처럼, 현재의 현존을 과거의 환상과 연결하고, 현실과 욕망, 나와 타자를 잇는다.

도시는 영화와 사진처럼, 우리를 ‘우리 아닌 것’과 연결하며, 고독 속에서 서로를 만나게 하고 우리를 완성시킨다. 기억과 역사, 거대 서사, 정체성, 아버지의 이미지까지 조각나 있는 하이퍼모던 시대의 분절성에 대해,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하나의 응답을 제시한다. 수년에 걸쳐 반복된 도시 산책을 서사의 은유로 삼음으로써, 파편화된 정체성을 봉합하는 것은 바로 서사의 대화적·통시적 차원—시간을 가로지르며 펼쳐지는 이야기의 힘—임을 보여준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이는 도시 공간과의 통시적 관계로 구현되며, 감독의 언어로 구성된 기억의 담론을 통해 드러난다. 김진아 감독에게 〈서울의 얼굴〉은 집단적이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아남네시스의 연쇄이자, 예술을 통한 일종의 치료 행위다. 이 작품에서 서울은 더 이상 교체 가능한 배경이 아니라, 그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행위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