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K-21 - 푸아트뱅]
Published November 28, 2017 - Source
장-루이 푸아트뱅, 불어에서 번역
천사의 날개…
너무 멀어서 기억할 수 없고, 동시에 기억이라는 말 자체로부터도 너무 멀다. 그리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1960년대 말, 라디오에서는 「만약 내가 천사의 날개를 가졌다면…」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담배 연기에서 피어오른, 향기롭고도 강렬한 냄새를 품은 구름 위에 등을 대고 누워 떠다니던 여행을 노래하던 곡이었다.
여기서는 그저, 날개로 모든 것을 스치듯 지나가는 천사의 이미지면 충분하다. 그 날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스쳐 닿은 모든 것은 같은 순간 안에서 흩어졌다가 다시 모인다. 섬광을 통과해 재로부터 되살아나듯, 닮아 있으면서도 변형된 상태로.
이 천사가 바로 김진아 감독이다. 그녀의 날개는 영화 〈서울, 도시의 얼굴〉의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급진적이면서도 폭력적인 부드러움은 영화의 언어—보는 것을 말하고, 예감하는 것을 보고,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을 더 이상 알지 못함을 깨닫는 그 목소리—에 의해 지탱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거의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의 영화를 만들어낸다는,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 가능해진다. 마법 같고, 혼란스럽고, 광기 어린 이 도시의 초상은 차분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너무나 정확해서,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입안에서 진실이 이를 갈게 할 정도다.
이 영화 속 모든 것은 접근할 수 없는 기억으로 이중화된 눈으로 바라보이고, 이미지가 되기를 거부하는 현재의 찢긴 손으로 어루만져지며, 희망이라는 빨랫줄에 보이지 않는 집게로 매달린 내일의 떨림을 들으려는 귀로 엿듣는다.
도시를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형시키는 몇 개의 지각 변동들은 이름 붙여지고, 시간과 공간 속에 배치되며, 마치 바이러스처럼 지속되는 영구적 재난의 형태로 세월을 가로지른다. 폭력적이거나 기적적인 강도의 장소들은, 수십 년의 세월이 덮어놓은 흔적들을 다시 육체 안에서 깨운다. 어떤 건물들은 마치 스스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화면 위로 튀어나온다.
그리고 딸과 아버지 사이에서—혹은 처음 이 도시에 도착해 냄새와 기척에 민감한 여행자와 도시 사이에서—귀환의 연금술은 향수를 단순한 회상이 아닌, 설명을 요구하는 힘으로 바꾸어 놓는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에서 징후를 읽듯, 그가 품고 있는 꿈이 도시의 층위 속에 구현되는 과정을 읽듯이.
‘모든 것’이라는 말은 이제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 어떤 것도 ‘전체’라는 개념 안에 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도시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손과 귀와 심장의 움푹한 곳에 자신을 위로하고 용서해 줄 어떤 진실의 조각을 쥐고자 한다.
필요한 것은—말로는 쉽고, 실천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전체’를 내려놓는 것이다. 붙잡으려는 강박을 잠시 접고, 보이는 것을 가로지르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 여기서는, 천사의 날개가 드리우는 그림자에.
21세기의 문턱에서 도시가 처한 위상의 변화를 정직하게, 그리고 내밀하게 인식한 김진아 감독은 날개의 그림자를 지나가게 하고, 그 그림자가 남기는 거의 보이지 않는 선들을 기록한다.
여기서 행위는 곧 보여주는 것이고, 보여주는 것은 말하는 것이며, 말하는 것은 행위가 된다. 그리고 그 행위는 드러냄이라는 일종의 마술적 작동을 완수한다. 이 단어가 너무 많은 의미를 짊어진 탓에 사용하기 조심스럽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묵시’라 불러야 했을 것이다.
역사는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과 자신 사이의 간극을 바라보는 방식으로만 드러난다. 즉각적이거나 매개된 의식의 자료들이 더 이상 인식의 중심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역사는 자신이 향하는 방향을 드러낸다.
도시는 삐걱거린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삐걱거림을 듣는다. 소음은 배경으로 가라앉고, 그때 비로소 삶의 작은 소리들—이유 없이 무너지는 건물의 소리, 혹은 조계사 금빛 부처의 미소가 만들어내는 침묵—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 소리들은 기억이 빠져나간 상처와 균열, 심연의 가장자리를 잇는 실들의 소리다. 기억은 떠나기 전, 그 가장자리에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우리는 천사의 날개가 ‘모든 것’을 가로질러 울리는 기적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된다. 도시를 흔드는 진동은 변형된 채로, 그러나 정확히 식별 가능한 형태로, 이 도시에 사는 이들의 정신 속에—적어도 자신의 도시로 돌아온 이 여성의 정신 속에—새겨진다.
그녀는 즉각 깨닫는다. 시간은 우리가 말해온 방식으로 흐르지 않는다. 시계의 논리에 맞추기 위해 반복해온 말들은 삶의 시간과 어긋나 있다. 살아 있는 신체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하나뿐이다. 바로 오늘이라는 시간.
그리고 오늘은, 각자가 매일 자신의 정신을 가로지르는 실들을 붙잡을 때만 열린다. 엉키고 찢어진 실들을—이미 낡았지만 여전히 입을 수 있어 버리지도, 남에게 주지도 못하는 옷을 기우듯—다시 꿰매는 일. 기억의 온기, 슬픔의 통증, 혹은 한 번의 미소를 간직하듯이.
이 영화를 이루는 이미지들은 ‘적은 이미지’처럼 보인다. 그것은 장비가 평범해서가 아니라, 오직 말들과 연결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말과 이미지가 서로를 어루만지며 오가는 왕복 운동 속에서, 때때로 진실이 가볍게 채찍질하듯 흐름을 멈춘다. 말들을 듣고 읽다 보면, 이 재취합의 운동이 바로 말에서 이미지로, 이미지에서 말로 이어지는 움직임임을 이해하게 된다.
김진아 감독이 우리에게 감각하게 하는 것은, 도시가 하나의 직물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늬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거리, 하늘과 기억을 오가며 직조를 수행하는 북의 움직임 속으로 스며드는 일이다. 그 움직임은 도시의 이미지뿐 아니라, 각자의 내면에서 살아 있는 도시 자체를 만들어낸다.
이 왕복은 하나의 운동이자 철학적 진술이다. 나와 타자, 도시와 꿈, 고백과 감정 사이의 간극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이 운동은 상처를 봉합하기보다 오히려 그 사이를 건너갈 수 있게 한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예감이 오늘의 도시를 가로지르며 서로를 비추도록.
그리고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연결과 통과를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정확한 거리다. 과거·현재·미래, 감정의 변주와 규칙과 법의 엄정함을 지우지 않은 채로.
이것이 김진아 감독이 이 영화에서 수행하는 몸짓이다. 웃고 울며 말하는 언어들과, 적은 이미지들이 어루만지고 드러내는 이 몸짓은 본질적으로 철학적이다. 도시는—그리고 감독이 말하고 촬영하는 그 도시는—중간 공간이며, 누구나 자신의 방식으로 점유할 수 있는 장소다.
각자는 도시라는 베틀을 오가는 작은 북과 같다. 자신에게서 미끄러지는 것에 이끌려, 각자는 그 행위를 통해 도시를 실험의 장으로 만든다. 그렇게 흐름 속에 휩쓸리며 우리는 이해하게 된다. 이 거스를 수 없는 혼돈 속에서도, 여전히, 언제나, 윤리를 발명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을.
